[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0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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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50년대 이후 문인이란 그저 방랑하는 '룸펜'에 불과해서 다방과 주점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듯이 잡문을 쓰거나 출판사 부근에서 시간제 일을 해주고 학교 선생 또는 신문사에 나가면 제법 행세를 하는 축이 되었다.

내가 창작과 비평사에 찾아가 만난 편집자란 평론가 염무웅이었다. 그는 나보다 겨우 두 살 위였는데 어른처럼 신중하고 나중에는 제법 재미있는 농담도 하게 되었지만 그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는 내 작품을 잡지에 실어놓고는 한편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 당국은 작자보다 편집자에게 먼저 게재한 책임을 물었고, '객지'는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월간중앙에 나가던 소설가 한남철이 염무웅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 사람인 한남철은 시원시원하고 어딘가 기자다운 시니컬한 데가 있어서 술자리에서 그의 농담을 듣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앞에서 나온 대로 그를 사상계 신인상 발표를 듣고 찾아갔던 편집실에서 만났다. 서울 거리를 오며 가며 몇 년에 한번씩은 부딪치는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한남철은 내 안부며 내가 여전히 글을 쓰는가를 묻곤 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눈이 번쩍 뜨이게 좋은 작품이야. 내 당신 그럴 줄 알았지.

그는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편집인 백낙청의 동아리 친구였다. 염무웅이 혼자 계간지를 맡아 꾸려 가던 무렵이라 그가 후견인처럼 도와주고 있었다.

나는 62년에 사상계에서 신인상을 받고 몇몇 잡지에 글을 발표한 적이 있어서 문단 안팎으로 친구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상급생이었던 김광남(김현)을 알았고 연극 하던 친구들을 통하여 김영일(김지하)를 알게 되었던 터였다. 김현은 내가 고교 일학년 때에 삼학년생이었다. 그와 처음 대면하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의 특별활동실이 꾀꼬리 동산이라고 우람한 고목의 숲으로 둘러싸인 언덕 아래편 교문 근처의 담장가에 있었다. 나는 중학교적엔 수영반에 들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등산반에 들었지 문예반 근처에는 얼씬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문예반'이란 말을 떠올리면 어딘가 근지럽고 쑥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런데 등산반은 교문 가까이에 있고 문예반실은 안쪽의 후미지고 조용한 곳에 있어서 악동들이 점심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가기가 맞춤한 장소였다. 더구나 그 옆의 담장 너머로 뻗은 나뭇가지에 올라서서 아래로 소리치면 맞은편 구멍가게의 아저씨가 딱성냥 두 개비와 팔말, 또는 럭키스트라이크 같은 까치 담배를 종이에 싸서 던져 주었다. 그날도 담배를 사다가 문예반실로 들어가서 느긋하게 피우고 있던 중인데 판자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나는 담배 쥔 손을 얼른 뒤로 감추었지만 이미 허공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는 삼학년의 상급생이었다. 아무리 안경쟁이에 어설픈 모범생이라 할지라도 일학년인 하급생의 귀싸대기는 때릴 수 있는 처지였다. 그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실내를 둘러보고 내 명찰을 보더니 이내 알아보았다.

-너 가끔 교우지에 나왔지, 문예반이냐?

-아닌데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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