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北核 잘 풀릴거야' 최면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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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는 좌파정권인가. "정부기관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국정원 인사를 둘러싸고 구태의연한 논란이 제기됐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성향은 바깥 세상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권의 현실인식이 문제다. 북핵 처리나 경제개혁의 장래를 우려하는 까닭도 한국 정부의 정세인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핵 위협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재벌개혁과 노사문제에 개입하는 정부의 칼날이 어디로 튈는지 미덥지 않다고 느끼는 외국인들이 적지않다.

지난 반세기 우리는 전쟁과 혁명, 군사독재와 민주화, 반공과 친북 논쟁을 압축(壓縮)경험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게 불확실성에 익숙해졌다. 북핵 문제도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제법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막연한 기대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할 역량이 없을 때 생긴다. 믿을만한 정보와 냉철한 분석에 기초한 미래예측이 어렵거나 혼돈 속의 국민을 추스를 지도력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사회질환이다. 그런 증상의 바탕에는 주변에서 느끼는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주변관계는 늘상 주눅들어 지냈던 역사다. 남북한이 매한가지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구분을 떠나 민족이라면 왠지 가슴 뭉클한 것도 그래서다. 북한이 들먹이는 민족공조가 먹혀드는 것 역시 그런 심리적 틈새 탓이다.

같은 민족이란 이유로 북핵이 우리에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은 자기최면도 주변강국 등쌀에 휘둘렸던 콤플렉스 때문이다. 또 주한미군 재배치나 부분 철수 논의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반미 주장엔 은근히 동조하고 싶어지는 이중성은 비뚤어진 안보의식과 바깥을 향해 꼬여 있는 심사의 합작품이다.

물정에 어둡기는 북한이 몇수 위다. 미사일과 핵무기를 거론해 일본의 군사현대화를 부추기고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통큰 시인이 일본 내에서 그토록 격한 분노를 촉발할지 몰랐던 북한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경고는 북한이 우리보다 철저했다.

그러나 자신의 핵보유 발언이 상대방을 원치 않은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무심하다. 이런 게 북한식 정세인식의 한계다. 어설픈 현실인식은 우리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진정 북핵이 그들의 체제보장을 위한 담보이며 협상수단이라 여기면서 북.미간 대타협을 촉구하겠다면 평양에 어떤 체제가 유지되든 감수하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탈북자가 속출하고 수십만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의 인권문제가 우선 고려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미 북측에 어떤 체제나 정권이 유지돼도 무방하다고 공언한 셈이다. 바로 이런 점을 미국은 이해하지 못한다.

또 盧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한국의 진보적 2030세대들이 동족의 인권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도 납득하지 못한다. 게다가 워싱턴이 일정 규모의 탈북자를 미국 본토에 수용하겠다고 나설 경우 한국 내 반응을 궁금해 한다.

기득권층에 비해 민주주의 이념과 인도주의에 친숙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세대의 호응을 기대한 발상이다. 하지만 북한을 자극할 미측 제안이 거꾸로 우리 젊은 세대의 반미운동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반세기 동맹에조차 여전히 예측하기 힘든 상대로 비춰지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변화와 개혁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세대의 절반 이상이 해외이민을 꿈꾼다는 조사 결과도 나와 있다.

이제 그들의 세상 보는 눈을 바로잡아 주는 일은 그들 덕에 권력을 얻은 자의 역사적 책무다. 스스로의 시각교정 노력 없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겠지만.
길정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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