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화한 태평양정상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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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만약 일본이 태평양공동체나 태평양정상회의 같은 구상을 앞장서서 추진한다면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선창에 선뜻 따라 나서기를 주저할 것이다. 과거는 과거라고 해도 소위 태평양 공영권의 악몽이 자꾸만 연상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호주나 뉴질랜드가 그런 일을 주도한다면 그건 앵글로색슨 족의 게임일 것이라고 치부되어 역시 아시아 사람들의 관심을 충분히 끌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대신 미국이 나선다고 하면 50년대의 동남아시아조약기구 (SEATO) 와 같은 볼록화의 수단으로 외면당할 공산이 크고, 따라서 태평양연안 공산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전두환 대통령이 지난 5월, 태평양연안국가 정상회의의 구상을 처음으로 밝힌 이후 관계국가의 지도자들과 매스컴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것도 한국이 이 지역의 협력체제를 주도하기에 현실적으로 가장 적임자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평양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제의한 것은 78년 일본의「오오히라」(대평정방) 수상이었지만 그것은 앞서 설명한 이유로 태평양연안 곳곳에서 메아리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전 대통령이 이번에 아프리카, 캐나다 순방을 앞두고 진해에서 태평양정상회담의 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태평양시대가 하나의「수사」에서「현실」로 바뀌어야 하고, 한국이 야심적이고 외교적인 이니셔티브를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전 대통령은 태평양정상회의가 역내 모든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고, 특정 국가의 패권을 거부하고, 정치화·블록화를 반대한다는 기본노선을 밝혔다. 정례적으로 열리는 정상회의의 목적은 역내의 교역을 늘리고, 경제기술협력을 강화하고, 인력개발·교통통신망을 확충하고 교육과 문화교류의 폭을 넓힌다는 것이다.
새삼 설명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태평양연안지역은 역사, 문화, 인종, 정치, 사회, 경제의 어느 분야를 둘러보아도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것이 대서양지역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며, 지금까지 지역협력기구다운 것이 등장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이런 이질성이라는 것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좁아진 세계, 높아진 상호의존도,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대서양연안에서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과학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자부심에 힘입어 역내협력의 장애요소로서는 빛을 잃게 된 것이다.
전후의 양극체제가 다변화하고「자원파워」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한 것도 태평양시대라는 개념에 현실성을 부여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태평양연안 국가들의 협력강화는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전 대통령은 작년 2월의 미국방문, 6월과 7월의 아세안 순방, 9월「트뤼도」캐나다 수상의 방한, 금년 들어서는 호주·뉴질랜드 수상들의 방한 때 이미 태평양정상회의를 비공식으로 제의하여 좋은 반응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말 캐나다방문 때는「트뤼도」수상과의 사이에 이 문제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포클랜드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레바논 사태에서 우리가 공포 속에 실감한 것은 강대국에 의한 분쟁억제력이 없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국지적인 분쟁은 언제나 한 지역 전체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까지 파급되는 분쟁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태평양시대라는 기치 아래 역내의 협력을 통해서 공동의 번영의 바탕을 다지고 다른 지역의 분쟁의 불길이 이 지역으로 옮겨 붙는 것을 방지하는 공동의 노력을 하는데 태평양정상회의라는 장치같이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구상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안다. 아세안을 어떻게 흡수하며, 일본의 이기주의를 어떻게 다스리며, 소련·베트남의 회원자격은 어떻게 할 것이며, 중공과 대만의 이해상충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건 어려운 일일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새 시대를 맞아들이는 일에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태평양정상회의는 진지한 협의를 거쳐 멀지않은 장래에 EC, 나토, 아프리카, 선진공업국의 정상회의 같은 실현을 볼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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