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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전 우승보다 값진 8강, ‘작은 거인’ 7인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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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국체전에서 8강에 든 천안 쌍용고 농구부 선수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팀들 중 평균신장이 가장 작았다. 사진=채원상 기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개그맨 박성광이 이 말을 뱉을 때마다 사람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그러나 사실 그 웃음은 유쾌함이 깃든 박장대소가 아니라 씁쓸한 현실에 대한 실소에 가까웠다. 입시·취업 그리고 출세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오직 1등에게만 주목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1등보다 더욱더 주목받아야 할 이들이 있다. 수없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 그들에게 우리의 응원은 ‘힘든 시간을 견뎌낼 힘’이 된다. 쌍용고 농구부는 그야말로 ‘비주류’였다. 선수 수급 자체가 어려워 단 5명의 선수로 출발했다. 그러나 창단 6년 만에 이들은 ‘비주류’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보다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난 3일 끝난 전국제천에서 쌍용고 농구부는 8강에 올랐다. 그리고 막강한 우승후보였던 용산고와 겨뤄 57대 52로 안타까운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쌍용고의 패배는 우승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엔트리는 10명이었지만 다른 시·도에서 이적한 지 1년 미만이라 경기를 뛰지 못하는 선수가 3명, 실제 경기를 뛸 수 있는 인원은 7명뿐이었다. 거기에다 다른 팀에 비해 장신 선수가 없어 평균신장 또한 작았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쌍용고는 8강의 쾌거를 이뤄냈다. 기자는 그들이 궁금해졌다.

탄탄한 팀워크로 단신 핸디캡 극복

쌍용고와 청주 신흥고의 연습경기 장면.

쌍용고를 찾아갔을 때 농구부는 단국대와의 연습경기가 한창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농구코트 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선수가 한 명 있었다. 농구선수라고 하기엔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1m66㎝의 가드 박세현(19)이다. 농구가 너무 좋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농구를 했다는 세현이는 경기를 뛰는 고교 농구 선수 중 키가 제일 작다. 농구선수가 되기 위한 제1의 조건이 ‘큰 키’라고 생각한 기자는 세현이를 만나자마자 “키가 작아 힘든 점은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저는 키가 작은 게 장점이라 생각해요. 다른 선수들보다 드리블을 낮고 빠르게 할 수 있거든요.” 버릴 수 없으면 껴안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실 단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쌍용고 선수들은 개개인의 단점뿐 아니라 팀 전체의 단점을 껴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농구부 창단부터 지금까지 선수들을 지도해 온 구건모(36) 감독은 “선수들의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체력과 조직력을 강화하는 훈련을 중점적으로 시행한다”고 했다. “장신 슈터가 없어 많은 점수를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완벽한 수비로 실점을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신장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지만 기술력과 조직력은 노력으로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과 조직력, 체력을 동시에 갖추기 위해서는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쌍용고 농구부는 정규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20분부터 밤 10시까지 연습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런 일상에 대한 불만이 없다. 당연한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구를 했다는 이재원(19)군은 “농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농구 말고는 다른 꿈을 꿔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놀아도 농구 코드에서 노는 게 편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농구는 마냥 즐겁고 행복한 ‘꿈’일까? 그래서 “힘든 적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시합를 앞두고 부상을 당해 경기를 뛰지 못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답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김 코치는 권시현(19)군의 일화를 전해주었다.

정규수업 후 매일 밤 10시까지 훈련

지난 4월, 2014 연맹회장기 전국남녀중·고농구대회가 있었다. 그때 쌍용고는 8강에서 휘문고와 맞붙게 됐고 사람들은 휘문고의 우승을 확신했다. 하지만 쌍용고는 보란 듯이 휘문고를 이겼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시현이의 팔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상황은 이랬다. 대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연습하다 넘어진 시현이는 팔목에 실금이 갔지만 부상을 코칭스태프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상을 알게 되면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임을 알기에 꾹 참고 경기에 임한 것이다.

시현이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했더니 시현이는 “꼭 뛰고 싶었다”고 답했다. 경기 하나하나가 이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농구 말고는 그 어떤 꿈도 가져보지 못했다는 이 어린 선수들의 열정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쌍용고 농구부의 슬로건이다. 오늘도 쌍용고 농구부는 이 슬로건을 가슴 한쪽에 걸어두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코트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이 언제쯤 1등의 영예를 거머쥘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쌍용고 농구부는 서두르지 않고 그들만의 속도로 전진해 나갈 계획이다. 비록 나이 어린 선수들이지만 이들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멈추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쌍용고 농구부의 빛나는 내일을 기대한다.

윤현주 객원기자 20040115@hanmail.net

흘린 땀방울만큼 열매 맺는다

지금의 쌍용고 농구부가 있기까지 가장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은 이는 구건모(사진) 감독이다. 창단부터 농구부를 맡아 운영해 온 구 감독은 선수들에게 ‘호랑이 감독’으로 통한다. 농구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구 감독은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선수’가 돼라고 지도했다. 더불어 실력뿐 아니라 인성을 갖춘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선수들도 그런 구 감독의 진심을 알기에 잘 따라주었고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를 끝으로 구 감독은 쌍용고를 떠나야 한다. 임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면을 통해 쌍용고 선수들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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