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증언한다-왜곡될 수 없는 일제 학정의 실상>(1)|안방서도 일어만 쓰게 하고 공용이라니…|우리말 말살 정책|이희승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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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이 당사국은 물론 세계 여론의 빗발치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의 사실 기록이 얼마나 거짓된 날조인가를 입증하는 생생한 증언들을 일제 당시를 살았던 체험자들로부터 들어본다. <편집자주>
『일제의 식민 정책은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녀요. 우리 민족의 혼을 모조리 빼내고 일본사람과 똑같게 만들려는데 있었지요. 우리 국어 말살 정책도 이러한 정책 목표의 한 수단이었던 거지요』
일생을 우리 국어 연구에 바쳤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땐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하 국어 말살 현장의 산증인 일석 이희승 박사 (86).
그는 요즈음, 일제 때 「조선에서는 조선어와 함께 일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일본 교과서의 왜곡 내용에 대해 특별히 큰 분노를 느끼고 있다. 『공용어란 이를테면 학교에서의 교육 용어, 정부의 공문 용어, 국회의 정견 발표 용어, 개인의 강연회 용어 같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사용하는 말이죠. 가정에서까지 저희 말을 쓰라고 해놓고 우리말을 공용어로 인정했다니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이 마당에 어떻게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일제는 1915년3월 사립 학교 규칙을 개정, 성경 및 한국의 지리·역사 교육을 금했고 38년엔 칙령 103호를 발표, 국어를 정과에서 수의 과목으로 변경하여 이를 교육 과정에서 제거토록 강요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일본어만 쓰도록 했으며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소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첫 시간부터 일본어로 가르치기를 강요했다.
42년엔 국어 시간이 아주 없어져 공적으로 우리 국어를 교육에서 추방했으며 특히 이해 10월엔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 국어 연구에 일대 탄압을 가했다.
『그땐 관청이나 공공 기관에 무슨 볼일이 있어 가도 일본말을 안 하면 상대도 안해 줬지요. 어린 국민학생들이 저희끼리 장난치며 놀다보면 자연히 우리말이 튀어나오게도 되는데 이때 들키면 벌금을 물어야 했어요. 팔순 노파가 기차를 타려해도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로 시작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일본어로 외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동회에선 주민들을 모아놓고 「황국 신민 서사」를 외고 허리를 90도로 꺾는 최 경례로써 일본을 향해 절을 하는 이른바 동방 요배를 시켰고, 창씨 개명을 해야만 민원 서류를 제대로 받아줬으며. 가정마다 「국어 (일본어) 상용」이란 쪽지를 벽에 붙이고 일본어를 사용토록 했다면서 일석은 당시의 지긋지긋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에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아무래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우리말을 연구·보존하려한 우리를 갑자기 불러다가 독립 운동을 했다고 가두고 고문을 얼마나 지독히 해댔는지 일일이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총독부는 36년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을 만들어 민족 운동자들을 요시찰인이라 하여 항상 감시하고 40년에는 「사상범 예비 구금령」을 내려 독립 운동 혐의자를 예비 구속할 수 있는 법적 조치까지 마련했다.
『이렇게 숨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는 탄압책으로 인해 우리 민족 정기는 질식 상태에 빠졌으며 오직 극소수의 지도자·학자·예술인·종교인들만이 지하에 은신하며 한민족으로서의 지조를 지킬 뿐이었지요. 조선어학회도 이 극소수의 인사들이 모인 민족 단체였습니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에 일제의 총검거의 마수가 뻗친 것은 42년10월.
『이 사건은 애당초부터 날조된 조작극이었지요. 한 철부지 여학생의 일기장 속에서 한 줄도 채 못되는 근거 없는 기록을 발견, 이를 기회로 탄압의 손길을 뻗은 것이지요.』
이 일기장에는 「국어 (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고 쓰여 있으나 조사 결과는 처벌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해 10월1일부터 다음해인 43년4월까지 검거 선풍이 계속됐다. 이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이 조선어학회 회원 대부분인 33명, 이중 구속된 사람은 29명이었다. 증인으로 소환 됐던 사람만도 약 50명이나 됐다.
『당시 이화여전 교수였던 나는 휴일이었던 10월1일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서려다 몰아닥친 형사대에 잡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갔지요.』 그후 경기도 경찰부를 거쳐 기차에 실려 함경도 홍원 경찰서로 끌려갔다.
죄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 이 사건으로 처음엔 정태진을 여학생 일기장과 관련된 「함흥학생 사건」의 증인으로 불러갔고 이어 이희승씨를 비롯, 이윤재·최현배씨 등을 연행해 1년여를 함흥·홍원 경찰서에 유치했던 것.
결국 함흥 검사국으로 넘겨져 13명만 공판에 회부됐는데 함흥 지방 재판소에서 각각 징역 2∼6년의 판결을 받았다.
『혹독한 고문을 당해가며 자백서 쓰기를 강요했어요. 쓰고는 맞고, 맞고는 또 쓰고, 쓰고는 비행기 타고, 타고는 또 쓰고, 쓰고는 물을 먹고, 먹고는 또 쓰고, 이러한 우리의 일과는 4개월간이나 반복됐습니다』
고문에서, 비행기를 태운다는 것은 일명 「공중전」. 손을 뒤로하여 허리에 묶고 팔에 각목이나 목총을 가로질러. 천장에 매단 후 뱅뱅 돌려 정신을 뺀다.
물을 먹이는 것은 「해전」. 긴 벤치에 눕게 하되 머리만 떨어지게 한 후 꽁꽁 묶은 다음 주전자로 코에 물을 붓는 고문법이다.
「육전」은 목총이나 각목으로 사정없이 때리는 고문이었는데 골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이런 육체적 고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고문이었어요. 얼굴 반쪽을 새까맣게 먹칠하고 등에 「민족 반역자다」라고 쓴 쪽지를 달게 한 후 같은 동지들로 하여금 욕을 하게 했어요. 안 하면 마구 갈겼지요. 서로 뺨을 때리게도 했는데, 정말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시켜대곤 했어요.』
이런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이윤재·한징 두분은 옥사하고 말았다. 옥중 건강 비결은 밥알을 온종일 씹어 삼켜 소화 기능을 보전했던 것.
일석은 2년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8·15 해방으로 이극로·최현배·정인승씨 등과 합께 함흥 형무소를 나왔다.
『요즈음 사람들은 일본이 어떤 나라이고 일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세대는 교체되고 경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본이 어떤 나라이고 어떤 민족인지 잘 모르고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그는 일본의 민족성은 교활하기 짝이 없고 배신을 누워 떡 먹듯 한다고 말했다. 일본 민족이 은혜를 항상 원수로 갚는 민족임은 수천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도 했다.
『일본말이나 조금 지껄여 그들을 만난다고 해서 아는 건 아니지요. 우리가 일본인의 진상을 파악하는데도 수십년 걸렸어요. 몇달 동안 회화나 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그는 일본이란 상대를 모르니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판판이 속아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을 잘 모르고 그들이 돈푼이나 있다고 굽신댄다면 참으로 수치스럽다고도 했다. 그렇게되면 강자에겐 아첨하나 약자는 깔보고 짓누르는 그들이 우리 민족을 안중에도 안 둔다는 것.
『그런 무시를 당하는 걸 보면 정말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정부는 뭘 하는 겁니까. 국회는 뭘 하는 겁니까. 일본인들이 뱃속에 어떤 엉큼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인식한다면 밤을 새우면서라도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모어를 잊어버리면 민족 정신은 죽어버린다고 강조하는 일석.
언어엔 항상 민족 정신, 즉 얼이 담겨 있으나 눈에 안 뵈니 그 소중함을 알지 못 하는게 안타깝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일생을 통해 노심초사하며 외길로 진력한 뜻을 읽을 수 있다. 『교과서 문구 몇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면에 깔린 속셈을 알아차리고 대처해야지요. 언젠가는 옛날 짓 저질러 올 적신호로 봐야합니다. 정부 당국이나 개인이나 정신 바싹 차리고 눈을 까뒤집고 경계해야 할 때입니다.』
이근성 기자

<일본 교과서 내용>
「조선에서는 조선어와 함께 일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제수서원 현대 사회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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