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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빈슨 감독 '화려했던 현역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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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미국 세인트루이스 김용철 특파원] 새미 소사(37·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지난 27일(한국시간) 통산 586호 홈런을 기록, 프랭크 로빈슨(워싱턴 내셔널스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대 공동 5위에 올랐다. 조만간 소사가 단독 5위의 자리에 오를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로빈슨 감독이 기록한 586홈런도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대단한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로빈슨 감독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코리안리거 김선우(27)를 중용하지 않기 때문. 그 외에도 투수 혹사감독, 인종 차별주의자, 선수 신뢰 부족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로빈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있어 인종장벽의 극복이라는 큰 획을 남긴 선수였고,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감독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운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35년 오클랜드에서 태어난 로빈슨은 중학교 때까지 농구를 했다. 당시 팀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빌 러셀이 이후 NBA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고, 로빈슨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는 기록을 세운다. 모든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로빈슨은 얼마 후 야구로 전향했고, 17세 때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을 맺고 3년간 마이너리그 생활을 한다. 1956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로빈슨은 타율 .290 38홈런 122득점 등 놀라운 성적을 내며 만장일치 신인왕을 수상한다. 이때 터뜨린 38홈런은 1987년 마크 맥과이어가 49홈런을 기록할 때까지 무려 31년간 신인 최다 홈런으로 남게 된다. 당시 로빈슨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장타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공격적인 플레이 때문이다. 좌익수였던 로빈슨은 웬만한 부상은 무시하고 경기에 나섰고, 언제나 허슬플레이를 펼쳤다. 타석에 들어설 때도 홈플레이트에 최대한 붙어 타격했고 웬만하면 헤드퍼스트슬라이딩으로 베이스에 들어갔다. 하지만 로빈슨의 투지와 실력을 시기했던 대부분의 백인선수들은 로빈슨에게 빈볼을 남발했고, 로빈슨은 총 7시즌이나 몸맞는공 1위에 올랐다. 언론과 팬들도 무뚝뚝하고 언제나 당당한 성격의 로빈슨을 못마땅해했고,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계속했다. 경기중 야유는 기본이고 욕설과 비난, 오물 투척,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가해 로빈슨은 권총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면서 인종의 벽을 허문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야구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 걸쳐 전반적인 현상이었다. 어쨌건 로빈슨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평균 타율 .301 32홈런을 기록하며 강타자의 입지를 굳혔고, 1961년에는 타율 .323 장타율 .611 37홈런 124타점 22도루의 화려한 성적으로 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의 홈런 경쟁에 밀려 매스컴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1962년에도 타율 .342 장타율 .624 39홈런 136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지만 모리 윌스(104도루)와 윌리 메이스의 활약에 가려졌다. 이후 메이스, 행크 에런, 로베르토 클레멘테 등의 외야수들과 경쟁했지만, 언제나 외톨이였던 로빈슨은 이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신시내티 구단마저도 로빈슨을 천대했고 1965시즌이 끝난 후에는 28세의 로빈슨에게 "이미 늙었다"라고 폄하하며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보내버렸다. 당시 대부분의 흑인 선수들은 내셔널리그에서만 뛰고 있었고, 아메리칸리그로 옮긴 로빈슨의 장래는 비관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로빈슨은 1966년 타율 .316 49홈런 122타점을 기록하며 트리플크라운의 위업을 달성했고 MVP도 수상했다(최초의 양대리그 MVP). 하지만 이 때에도 팬들은 샌디 쿠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에게 열광했고, 다음해에는 칼 야스쳄스키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로빈슨은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사정을 별로 바뀌지 않았다. 결국 로빈슨은 통산 타율 .294 장타율 .537 586홈런 2943안타의 기록을 남기고 197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현역 생활을 접는다. 하지만 이미 1975년부터 클리블랜드의 선수 겸 감독, 즉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큰 성과를 달성해 놓았다. 로빈슨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단연 '흑인 슈퍼스타'와 '흑인 최초의 감독'이다. 1947년부터 재키 로빈슨이 활약을 하긴 했지만 최고의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빈슨은 언론과 팬들의 주목을 떠나 '흑인 선수도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해냈고 이에 힘을 얻은 많은 흑인 청소년들이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감독 코치는 물론 프론트 직원들을 통틀어 유색 인종이 전무했던 메이저리그 구단의 감독이 되면서 일종의 성역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어쩌면 다른 흑인 선수들이 유순하게 백인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온 전례와 달리, 항상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백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우월적 지위를 여지없이 무시해버린 로빈슨 이었기에 그러한 성과를 얻어냈는지도 모른다. 현재 로빈슨이 보여주고 있는 감독으로서의 능력 성품 용병술 등을 떠나 한때 최고의 선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기록을 남긴 점과 수많은 차별을 감내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올라선 로빈슨의 업적은 그 자체로 높게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 김용철 특파원 기사제공: 마이데일리(http://www.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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