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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감한 인플레 정책 펼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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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D(deflation)’의 공포가 다시 세계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일본 ‘아베노믹스’가 좌초 위기에 빠지면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내년 10월 예정했던 소비세 추가 인상을 사실상 철회할 태세다. 무제한으로 돈을 푸는 ‘양적완화’ 공세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그러자 0%대 성장률로 고전해온 유로존의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국채 매입을 시사하며 다음달 4일 이사회를 열어 1조 유로(약 1370조원) 규모의 양적완화를 본격 논의할 예정이다. 경기둔화에 직면한 중국도 저가 수출품을 앞세워 디플레이션 수출에 나섰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 종료 이후 퍼지던 낙관론은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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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유럽발(發) 디플레이션 불똥은 국내로도 이미 옮겨붙었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개월째 1%대를 기록 중이다. 연초 마이너스로 떨어졌던 생산자물가 상승률도 6~7월 플러스로 돌아섰다가 8~9월 다시 두 달 연속 마이너스 행진 중이다. 생산자물가가 대략 1~2개월 소비자물가를 선행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상당 기간 물가는 하락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과 유럽의 양적완화 공세는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킬 공산이 크다.

 기축통화국의 양적완화는 외국에 디플레이션을 수출하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일본이 양적완화 공세를 높이면 엔화가 떨어진다. 일본 기업은 이를 무기로 수출품 가격 인하에 나선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올 들어 8~15%가량 차값을 낮췄고 미국에선 반값 소니TV가 등장했다. 유니클로가 한 벌에 1만원도 안 되는 옷을 내세워 수시로 세일에 나서는 것도 일본발 디플레 수출의 한 단면이다. 이와 달리 일본 국내에선 수입품 가격이 올라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엔저가 외국엔 디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자국엔 인플레이션을 수입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선진국 간 통화전쟁의 희생양은 신흥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한국은행이나 정치권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과거 물가를 낮추는 데만 급급했던 고물가시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 입장에서도 물가가 떨어지면 당장 생활이 나아지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우려에 둔감하다. 홍성국 대우증권 부사장은 “일본은 과거 20년 동안 디플레이션을 겪으며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극장의 함정’에 빠졌다”며 “한국도 그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시장에 과감하면서도 일관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아베노믹스가 좌초 위기에 빠진 것도 초기 주가 상승과 소비 회복에 고무된 아베 정부가 지난 4월 소비세를 5%에서 8%로 한꺼번에 3%포인트나 올린 게 결정타가 됐다. ‘온탕’인 줄 알았던 시장에 갑자기 ‘냉탕’ 신호를 보내자 그나마 살아나던 소비심리가 얼어붙었다. 이상빈 한양대 파이낸스 경영학과 교수는 “아베노믹스의 위기는 한번 빠지면 백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정부·한은은 물론이고 정치권이 과감한 인플레이션 정책을 쓸 것이라는 일관된 신호를 시장에 주지 않으면 디플레이션 우려가 조만간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동호 선임기자,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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