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절강편씨|임난때 명장 갈송이 시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편씨의 보사는 1599년 시조편갈송(도독공) 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편씨성이 생겨난 것은 그보다 휠씬 전인 1443년이다. 편씨의 원래 성은 중국계의 이씨었다. 그 내력을 살펴보자.
「출편씨가부」 에 따르면 시조의 선대는 명나라 조정에서 한립원 학사벼슬을 했던 이비로 되어었다. 당시 세자인 영종이 궁인 원씨를 총애하던중 즉위하자 원씨는 황후의꿈을 갖고 신하들을 포섭,황제에게 접근했다. 공은 임금께『정실을 황후로 맞는게 천리에 마땅하다』 고 극간,처음엔 노여움을 샀으나 끝내 그의 충절을 높이 치하, 일편단심의「편」자를 사성하고 태자대사를 제수했다는 것이다. 그의 큰아들 일이 절강백에 봉해짐으로써 오늘날편씨들은 그들의 본관을「석강」으로 삼게 되었다.

<3아들들도도 귀화>
시조 갈송에 관한 역사는 임진왜란 매로 거슬러 올라간다. 숲산포에상륙하여 물밀듯이 북상하는 왜군에 쫓겨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하고 나라의 운명이 품전등화격일 매우리 조점에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이여송에게 4만군사를 주어 돕도록 했다. 이때 이여송의 유격장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꾸괴칠성각공격에 큰꽁올 세운 장수가 편갈송이다.
그는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나와많은 공을 세웠으나 고국의 간신배들로부터 모합을 받아 공을 인정받지 못하자 귀국을 단념하게된다.「난정부거」『어지러운 조정에서는 벼슬자리에 서지말라』 는 재명을 남긴 갈송은 경주 남쪽의 금번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게 명나라에 두고온 풍세·풍원·산보등 세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출범한후 무고로 귀국못함을 알자 가산을 정리,아버지를 찾아나섰다.『우리들만 편안하게 모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산다는건 자식된 도리가 아니다』갈송의 아들 3형제는 이렇게 결의하고 조선에 나와 백방으로 수소문끝에 금노산에 아버지가 은거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3형제가 그곳을 찾았을때 갈송은 이미 노환으로 세강을 뜬 뒤였다. 그들은 3년동안 시묘를 하고나서 의논끝에 아버지의 뼈가 묻힌조선땅에 살기로 작정했다. 풍세· 풍원이 나주땅으로 들어서고 막내 산보는 전배 만경에 터를 잡으니 오늘날 1만1천여 편씨의 잔뿌리는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풍원은 중국에서 나올 때 부인 이씨를 데리고 나왔으나 형 풍세는혼자었다.그는 조선에서 오천정씨를 아내로 맞아 두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이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편성대다. 편성대의 자는 형면,호는 수림이다.1605년 전남나주군곡강면내동 (지금의 동강면설산리)에서 태어났다. 성대는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준수한데다 기골이 장대했다. 열다섯살때 화순에 사는 안동금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처가인 화순으로 이사를 했다. 화순에서 고향인 나주내동까지는 1백여리. 그는 이사를 간뒤 매일 새벽 백마를 타고 나는듯 달려 부모님묘소에 인사를 드렸다. 기골이 강대한 헌헌장부가 백마에 높이 올라 거리를 질주하는걸보고 화순사람들은 그를 가리켜「편한량」이라고 불렀다.
당시 화순현에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 조수성이 살고있었다. 성대보다 방세가 위인 선비로 일대에서 추앙을 받고 있었다. 나주에서 태어난 편성대가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킨 청강 조수성과 손을 잡게된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다. 청태종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육박한 것이 인단14년. 정묘효난뒤 9년만에 다시 일어난 병자호난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해갈 시간조차 없어 남영산성으로 올라갔고이내 열읍에 글을 내려 의병을 촉구했다. 화순선비 조수성이 격문을 냈을때 제일 먼저 달려온게 편성대이었다.
그의 직책은 독전군관겸 후런대강이었다. 편성대의 의병일행은 청주에 도착,청병의 배후를 기습해 적범 아홉을 밴뒤 진격중 인조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의거 한달만이었다.의분을 못이겨 자결을하려다 주위의 만류로 미수에 그치고 『대명일월』을 좌우명삼아 69세에 일기를 마치니 나라에서 가선대부 이조삼리을 증직했다.당시 할복자살한 사촌동생 영양에게는이조삼의가 추충되었다.
편씨의 문혼인 일편단심은 일제치하의 조국광복에 젊음을 사른 애사편강렬(1892∼1928년)에게로 이어진다.

<항일군조직 앞장>
그는 가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에서 편상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체결후 이강년 남도의병대장의 휘하에 들어가 17세에 선봉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중양주에서 왜적과 접전,부상 당했다.
1911년 평오 숭실학교 재학때는「데라우끼」(사내정의) 층독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소위 유동선·윤치호·양기탁 등이관련되었던 『1백5인사건」 이다.
1912년 『1백5인사건』에서 풀려나자 강렬은 선고향인 금능군으로 내려가 인근 청장년 3O명을 모아 항일사상을 가르치는 한편 무술을 연마했다.
이미 고인이된 항일독립유공자 편덕렬씨(강렬의 동생)의 생전 진술에 따르면 강렬은 8척장신에 얼굴이 말보다 길었고 힙세기로는 싸우는 두마리 소사이에 들어가 소를 메어 말렸고 냇물을 건널 때 한팔을 펴 네사람을 매달리게해 건네주었고 거구인데도 가볍기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을 무대로 독립군을 규합하다 일경에 붙잡혀 1년반을 복역.그는 다시중국으로 떠나 산해관에서 양기탁·남정씨등과 의성단을 조직한다. 요즘의 특전 게릴라인 셈이다. 편강렬은 중국내 모든 단체 합쳐 일대 항일군을 편성하려고 동분서주하다 금성근의 밀고로 1924년 하르빈에서 잡혀 7년형을 선고받는다. 반역자 금은 이범석장군에게 붙잡혀 그자리에서 총살되었다. 신의주에서 복역중 옥질로 보석,선천 미간범원에서 1년반을 치료받다 끝내 안동적십자병원으로 욺겨져 숨을 거두었다.
『내 죽거든 만주땅에 묻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 이는 37셰룰 일기로 순국한 강렬의 유언이었다. 지금도 그의 유해는 만주땅 안동현 진강산기슭 장군봉에 묻힌채 광복후 국내로 이장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동생 덕렬마저78년 세상을 떠나 이제는 묘의 정확한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62년3월1일 건국공로훈장 태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경주가 본야으로>
『우리들의 관적은 절강이자만 진정한 본향은 경주입니다.이망위에서4백년가까이 살았고 시조의 영차한 유택이 경주 금오산에 있기매문이지요』편회장은 중국을 큰집으로 섬기던 전통적 사상은 이미 청산되었다고 한다.
75년 국세조사당시 전국의 편씨는 2천2백20가구에 1만1천1백명, 인구순위 93위. 대종회측에선 82년현재 1만4천여명쯤 될것으로 추산하고있다. 편씨종사보에 따르면 양주·남양·이천등 29본이 전하고 있으나 모두 분파세거지를 나타낼뿐 단일본으로 통한다.
현존인물중 변호사 편영완씨(65)는 서울고법관사·서울지법부잠판사를 거친 재야법조계의 중진.그는 서울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며 법조계에 남긴 공으로 연조소성훈장을 받았다.
편정희씨 (65· 한국성인복지시설협회장) 는 우리나라 의정사상 몇 안되는 여성의원(8대·전공화당)으로 여성경제인협회응 조직,여권신장에 힘을 쏟기도했다.
육군장성인 편동수씨는 무장을 시조로하는 편씨문중에서 4백년만에 탄생된 장군. 명의회회장 편홍기씨와 편정희씨는 친남매간이며 그의 아들 종근씨는 공학박사로 현재 명지대토목과장.

<지명인사>
▲편창길 (의박· 마포의원장) ▲편근영 (전심의원심계관) ▲편중렬 (금산향교장의) ▲편재열 (금천주조협회장) ▲편선자 (서산군 영항국민학교장) ▲편재구(사법서사)▲편재룡 (인쇄업·대구화수회장) ▲편무실 (곤박·명지대화공과장)▲편용낙(광명수지공업사장) ▲편인범 (단국대상경대학교수) ▲편일자 (서일개발대표) ▲편송언 (삼성전자이사) ▲편도권 (대자개발전무) ▲편정조 (공박· 미국윈자력연구소) ▲편장원 (육군대령) ▲편창만 (제일 은행 프람크푸르트지점장)▲편창동 (성인치과의원장) ▲편원득(한국은행차장) ▲편일간 (문화방송보도제작부장) ▲편광의 (해군사관학교교수) ▲편부만 (평통자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