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57. 구원의 손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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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와 결혼하기 전 미국 뉴욕에서 사업을 하던 시절의 아내.

코리아타운의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여성은 나를 알아봤다. "혹시 배삼룡 선생님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만…." 아주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미모의 여성, 나를 아는 단순한 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옛날에 극단 연구생으로 잠깐 있었어요. 하긴 그때 배 선생님은 주연급이라 절 모르시겠네요." 자세히 보니 전혀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혹시 시간 있으세요? 제가 점심을 사도 될까요?" 딱히 할 일이 없던 나였다. "네, 그러시죠." 그가 근처에 잘 아는 냉면집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그 음식점으로 갔다.

그의 이름은 기영숙이었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사람이다. 그는 유랑극단에 잠시 몸담았었다고 했다. 연구생 시절을 잠깐 겪은 뒤 한국전쟁 때 육군 군예대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8군 무대에서 일했어요." 미8군 클럽은 당시 연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활동무대였다. "그러다 베트남전 때도 사이공(현 호찌민시)에서 공연단 소속으로 일했어요." 그때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미군 간부들이나 베트남 주재 한국영사와도 친분이 두텁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얘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베트남전이 끝날 무렵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죠. 그때 영사를 통해 미국 비자를 구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이후 미국 시민권까지 얻었다고 했다.

그는 사업가였다. 유럽에서 고급 의류를 수입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국땅에서 여자 혼자 몸으로 사업하기가 쉽진 않아요. 그래서 지금껏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죠." 그는 미혼이었다. 결혼 경력이 한 번도 없었다. 늘 사업이 최우선인 모양이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였다. 2주 뒤면 비자 유효기간이 만료돼 불법 체류자가 될 형편이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다. "어떻게 좀 도와줄 방법이 없겠소? 나 좀 살려주시오." 나와 헤어진 뒤 그는 고민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새로 비자를 내기도, 여권을 만들기도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미국 영주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서울에 사는 큰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배삼룡씨와 결혼하는 건 어떨까?" 그의 큰 오빠는 "왜 하필 미국으로 도망간 그 사람이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전화료나 아껴라"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배삼룡에 대해 물었다. 그 친구 역시 연예계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양반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널 골탕먹이진 않을 거야. 그래도 결혼 문제는 신중하게 결정해."

누가 봐도 대조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미모에 재력까지 갖춘 미국 시민권자였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였다. 게다가 두 번의 이혼 경력까지 있었다.

비자 만료일을 일주일 앞두고 그가 전화를 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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