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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6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Y는 22년 창설된 이후 기독교 가정,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여러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먼저 받게 된 특혜에 대한 사명감을가지고 아직도 새로운 교육이나 새로운 기회에 접하지 못한 많은 여성들을 계몽시키는 계몽운동등으로 기독교 여성, 기독교 학생들뿐 아니라 농촌 구석구석을 찾아 그들을깨우쳐주고 새것을 보게 하는테 힘을 기울었고 세계 YWCA와의 관계도 날로 증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인 야욕으로 말미암은 말할 수 없는 억압정치가 펼쳐지면서 YWCA도 그들의 미친듯한 탄압의 망치를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일제의 야욕이란 만주사변과 37년7월에 터진 중·일전쟁의 도학선이었던 노구교(노구교)에서의 중·일간의 충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할 필요가 없기에 생략한다.
이 때부터 그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부가한 탄압정책을 들어보면 젊은이들을 광산과 공장으로 징용해간일, 여기엔 여자들까지도 동원해갔다.
국민정신 총동원연맹을 조직하고 애국반을 조직하여 이런 세부조직을 통해 시민생활을 통제한 일, 현금·헌품(은붙이와 금붙이등)실시와 식량배급을 한일,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당황하게했고 애국애족의 거룩한 생각을 좀먹어버렸던 최악의 만행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모든 집회의 신고제와 더불어 감시한 일, 일어상용·창씨강요등이다.
37년께부터 YWCA는 어떤 회의도 형사가 동석하여 회의에서 오간 모든 의결사항은 물론이려니와 누가 무슨 발언을 하고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다는 세세한것까지 다 적혀졌고 보고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가 제대로 이루어질리가 없고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런 상황속에 한국Y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이었다고나할까. 비록 일본에 속하여 식민지 저지에서나마 어떤 요행이었던지는 몰라도 일본제국주의에 저촉됨이 없이 그런대로 교육·계승·훈련등이 당시 여성들의 능력에 알맞게 이루어져 나갔고 일본 YWCA를 거치거나 소속되지 앉고 계속되어왔는데 38년엔 그 특별한 관계-세계와의-가 결국에는 무너지게 되었다.
처음 세계Y에 가입할 때 일본Y의 양해를 얻어서 이루어졌고 한국Y창설을 축하하는 전문까지도 보내왔으며 그에 대한 감사장도 발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이후 박봉자·김성모씨가 일본 Y의 협조로 일본에 가서 훈련을 받았고, 36년 실론 회의때 세계Y에 요청한. 의원을 세계Y 주선으로 일본Y에서 한국에 간사l명의 봉급을 지급할것을 약속했다. 38년 일본쓰다영학숙(진전영학숙)을 졸업한 최보경씨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 한국Y의 세계탈퇴는 일본Y측에서 종용했기 때문은 아니었던것같다.
당시 총독부로 부터 어떤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기록에 남길수 없었을 것이니 당시 그들이 행한 교활하고도 악랄한 짓을 생각하면 이 역시 그들이 한일이라고 밖에는생각할 수 없을것같다.
한국Y가 세계Y로부터 탈퇴하고 새로 일본Y의 한 지부의 구실을 하기까지는 몇단계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한국Y는 우선 일본Y연맹(연합회)에 가맹수속에 관한「타합위윈회」 를 38년7월15일 일본Y에서 파송된 미국인 총무와 일본인 주임간사 두사람을 참석시킨 자리에서 개최됐다. 이날의 회의는 대단히 침통했었을 것으로짐작된다. 학생신분으로 용감하게 세계 수백개국 각양각색의 대표들이 모인 워싱턴대회에서 한국이 독립적으로 가입하도록 했던 그 장본인김활난박사가 이 위윈회를 사회하면서 국가의 주권이 남의 손에 빼앗긴것도 가슴아픈 일이거든 이제 또다시 같은 손으로 일본YWCA연맹의 하나로 하겠다는 결의를 할때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것인가! 한국YWCA 반백년 기록자는 당시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했던 일간지)에 기록돤 기사를 인용하었는데 그 내용인 즉『비상시국에 있어 시국을 재인식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하는 의미에서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했다.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때 그 위원회는 오히려 문을 닫고말았어야했다고 하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분위기, 그 상황속에서이지만 그래도 죽이고 싶지 않은 그 안타까움도 가슴 찌릿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활발했던 한국YWCA활동은 결국 나날이 심해가고 죄어지는 일제 탄압-일어상용, 창모개명-등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히 아는 그런 야만적인 행동에 개인이나 단체나가 같이 춤을 춰야하는 속에 활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40년까지는 임원회 세계Y기도주간 행사 같은것 정도의 프로그램을 가졌을 뿐이다가 결국 41년부터 간판을 내리고 19년의 역사로 광복까지의 한단계에 종지부를 찍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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