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각국의 은행 이용 관행을 알아보면…서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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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각종 예금·주식 등 금융자산의 실명화를 비롯한 금융개혁 조처가 추진되고 있다. 구미에선 몇십 년에 걸쳐 정착된 실명제도를 한꺼번에 이룩하려는 것이다. 구미에선 어떻게 실명화가 정착되었으며 은행을 이용하는 제도와 관행은 어떤가. 또 급전은 어떻게 융통하며 사채는 없는가. 이를 본사 특파원들을 통해 알아본다.<편집자 주>
은행예금과 과세
서독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지면 있는 독일사람들은 이따금 한국인끼리 1천 마르크나 2천 마르크를 스스럼없이 빌려주고 받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1, 2백 마르크 정도라면 몰라도 그만한 거금은 마땅히 은행에서나 빌리는 것으로 인식 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어느 개인을 상대로 돈을 꾼다는 것은 「은행에서 대출 받지 못 할 사정이 있는 사람」, 바꾸어 말해 신용을 잃어버린 불성실한 사람으로 돼 버리기 십상이다.
독일사람들이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모든 가계가 은행과 거래를 갖지 않고는 꾸려 나갈 수 없도록 경제구조가 짜여 있기 때문이다. 전기·가스·전화요금 등의 기본적인 가계 지출이 자동적으로 은행을 통해 인출되도록 제도화된 탓으로 어느 가계나 은행과 줄을 대고 있다.
서독에서는 18세 이상이면 은행구좌를 가질 수 있다. 다만 은행 창구에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해 본인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실명이 아닌 익명의 구좌 개설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제도적으로 대부분의 가계가 은행과 연결 돼 있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현금이 외에는 거의 저축성 예금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은행을 통한 가계자금의 출입은 「지로」구좌로 금리가 붙지 않기 때문에 정기예금이나 통지예금구좌를 따로 갖게 마련이다.
은행의 예금 금리는 대체로 5∼8%선에서 시장금리에 따라 변동하고있으며 은행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또 같은 은행이라도 고객과의 약정에 따라 예금 금리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통상 예금 인출 1개월이나 2개월 전에 통지해야 찾을 수 있는 통지예금의 이자는 5% 선, 3개월 이상 정기예금의 경우 8% 가까이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이밖에 목돈 마련을 위한 부금저축이 있는데 기간은 대체로 5년, 이율은 5% 내외다.
이렇게 해서 81년에 은행에 몰려든 저축성 예금은 5천억 마르크(1백 50조원)가 넘고 있다. 이는 국민 1인당 저축액으로 볼 때 8천 마르크(2백 40만원)가 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서독 정부는 자랑하고 있다. 또 이 저축은 해마다 5∼6%씩 증가 추세에 있다.
은행 예금에 대한 이자소득은 연 4백 마르크(12만원)까지 면세가 되며 그 이상이면 연말에 종합소득으로 신고하도록 돼 있다. 이자소득에 따라 세금을 매기지 않고 전체소득과 합쳐 종합과세하기 때문이다. 세율은 기본소득세율 22%부터 적용되어 56%까지 누진 과세된다.
예금이자 소득의 경우 은행에서 따로 세무당국에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신고하지 않으면 세무서에서는 그 소득 발생 분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세무당국에서는 탈세의 요소가 많다고 보고 원천징수를 검토한 적도 있으나 『목돈을 마련하려는 서민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야박할 수 없다』는 의견에 밀려 흐지부지 됐다.
그러나 부동산을 구입한다던가, 많은 돈이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자금 출처를 세무당국에서 추적, 탈세 사실이 밝혀지면 가혹한 추징 조치가 뒤따르게 마련이라 「호주머니 돈」 이상의 탈세는 염두도 못내는 게 일반적이다.
서민·중산층의 재산 증식
서독 정부는 1950년대부터 국민의 재산 형성을 쉽게 해주기 위해 일정 소득수준 이하의 국민에게 여러 가지 특혜 조치를 취해가며 저출을 장려해 현재 국민의 70% 이상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서독에서 처음 시작된 재형저축은 주택자금 저축이었다. 「소유는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인식에 따라 가장 안정된 소유 형태로 주택을 택했던 것이다.
이 정책은 주택금고에 부금으로 저축하는 개인에 대해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저리융자를 실시하는 한편 재산세의 일정기간 면제 등의 특혜를 주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서독 정부는 50년대부터 적금저축(재형저축)을 유도, 은행이나 기타 금융기관에 6∼7년 예금하는 경우 국가가 연 14%(자녀 1명에 대해 2%씩 증가)의 보조금을 지급, 재산 증식을 도와 왔다.
이 제도에 많은 국민이 호응, 저축 의욕을 높이는데 성과를 거둔 정부는 의욕 뿐 아니라 저축 능력도 높일 필요성을 느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도를 개선, 통칭 「6백 24마르크법」이라는 법을 마련했다.
다달이 52마르크씩 1년간 모두 6백 24마르크를 불입, 6년간 저축하면 30∼50%의 보조금을 국가가 보조하는 제도다. 보조금 외에 예금 금리도 가산되기 때문에 수익률도 대단히 높다. 다만 가입 조건은 연간 실질소득이 4만 8천 마르크(1천 4백만원, 독신자는 2만 4천 마르크) 이하인 근로자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주택저축부금·장기예금·생명보험·증권투자 등 근로자의 선택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이 재형저축은 가입자가 부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고용자와의 노동 협약에 따라 불입금의 전부나 일부를 고용주가 부담하는 것이 통례다. 이에 따라 현재 서독의 2천 2백만 근로자중 70%인 1천5백만 명이 가입하여 1년간 저축하는 금액은 정부 보조금과 이자를 합쳐 1백 10억 마르크에 이르고 있다.
사채시장과 급전 운용
서독의 경우 시민의 거의 대부분이 은행에 구좌를 가지고 있으므로 돈이 필요하면 그날로 은행에서 대출 서류에 서명하고 융통해 쓸 수 있다. 제한이 있다면 거래 실적에 따라 은행이 설정한 「신용한도」 이상은 안 된다는 점이다.
그 이상의 돈을 빌어야 할 경우엔 물론 그만한 담보가 있어야 한다. 담보가 확실하면 은행측은 기꺼이 대출해 준다. 『제발 많이 좀 은행돈을 이용해 달라』는 게 은행의 권유다.
그래서 일반시민의 가계 지출이 많아지는 계절, 이를테면 휴가철(대부분 한달 이상씩 해외 여행) 같은 때면 고객의 신용대출 한도액을 알려 주는 편의에서부터 융자 안내서 등이 은행으로부터 날아든다.
서독에서 은행 문턱이 처음부터 낮았던 것은 아니다. 서민에 대한 은행 대출이 수월해진 것은 60년대 이후로 그전에는 고리대금업이 성행, 한때는 서민금융의 60%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속칭 「돈 삼키는 상어」로 불리는 이 사채는 대금업자의 자금을 담보로 한 은행 융자를 알선해 주고 각종 수수료 명목 등으로 40%에서 1백%의 이자를 우려내기도 했다.
이 사채시장은 은행 문턱이 낮아진 이후 계속 줄어들고는 있으나 아직도 서민금융의 16%를 차지, 주로 무지한 사람들, 특히 독일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 막노동자들을 상대로 3류 신문 등을 통해 「번개 대출」 「15분 대출」 등의 광고를 내고 있다.
기업의 경우 이러한 악성사채를 쓴다는 일은 서독의 경제구조로 보아 불가능하도록 돼 있다. 불합리는 도태되게 마련인 반면 기업이 합리적으로 필요한 자금은 은행에서 대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또 고리의 사채를 얻어 쓴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내 기업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많든 적든 돈이란 것이 대부분 은행이나 증권시장에서 안정된 이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기업을 상대로 돈놀이를 할만큼 자금 동원 능력을 가진 「큰손」이란 게 존재할 수 없도록 돼 있다.【본=김동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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