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여성 클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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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36년 서울Y에서 필자가 주축이되어 직업여성 클럽을·조직했다. 이클럽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첫사업으로 연극공연을 하기로 했다.
학생때 부터 연극을 좋아해서 함께 연극구경을 다녔던 장영숙씨, 당시 세브란스병원 치과의사 이양숙씨등 이 모여 각본선택 부터했다.
장영숙씨는 그해 봄 이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나와 함께 모교 영문과 조교로 재직하고 있었다. 39년에는 동지사 대학에서 BA를 하고 47년7월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세계기독교청년대학에 한국Y 대표로 참석했다. 그뒤 곧 미국 미시간 대학에 유학하여 연극학울 전공하고 60년부터 이대영문과 교수로 근무한 사람이다.
3O년대는 극단들이 신파극을 했을뿐 예술성 있는 연극공연은 귀했던 때다.
토월회가 신극운동을 시작 했지만 오래 계속하지 못했고 34년 동경유학생과 유치진씨를 중심 으로한 극예술 연구회가 조직되어 번역극을 공연하고 자연 주의적인 창작극을 공연하는 정도였다.
학생극도 이화여고, 이전의 격년공연과 연전의 학생극이 33년부터 해마다 공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겨우 새 터전을 마련하고 있던 신극계의 한구석을 차지해 보겠다는 의욕과 연극을 통해 예술에 대한 이해와 회원들간의 친목을 도모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 어려운 연극공연의 작업을 하기로 했다.
대본은 영국의 시인이며 극작가인「존·메이스필드」의『낸의 비극』을 선택해서 시인 박용철씨가 번역을 맡아주었다.
박용철씨는 극예술연구회 멤버로 직접 연극무대에 서지는 않았으나 연극을 좋아하고, 연극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문인이다.
변역료도 물론 무료였다.
장영숙씨와 나는 연극을 좋아하고 희극을 많이 읽었으나 무대경험은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 무대경험 이라고는 이전 재학때 영어연극을 한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극예술연구회 멤버 몇 분( 박용철씨외에도 이헌구·홍해성씨)의 격려에 힘입어 열성 하나만을 가지고 36년10월 주야 2회공연의막을 올렸다. 장소는 당시 건립된지 1년인가 밖에 안되는 부민관(지금의 세송문화회관 별관) 이었다.
연출·무대장치·분장등 당시 최고수준 이었던 극예술연구회의 설비에 의한 도움은 순수연극애호의 발로였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YWCA는 나에게 큰 기회를 주었고 그 경험은 결국 내가 2년 후인 38년 미국에 유학을가서 연극을 전공하게된 크고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유학한 대학은 얼라배마 여자대학으로 그해 대학의 학생YWCA가 동양학생을 위해 첫번으로 준 장학금을받아 가게 되었던 것도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해서 필자는 안팎으로 YWCA와 인연이 깊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40년은 한국YWCA가 간판을 내려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때였다.
38년 일본Y에 통합된 한국Y는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부터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갔다.
일어사용을 강요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교도 2천여명을 투옥, 교회 2백여개를 폐쇄하는등 일제의 발악은 극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탄압으로 여학교 Y·시Y등 각 지방조직이 소멸되고 Y연합회 총회도 40년 원산회의를 끝으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눈물어린 그 마지막 예배에 참석했다. YWCA가 문을 닫아야 했고 일제탄압으로 인한 YWCA 활동이 막혀버리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직업여성 클럽과 연극도 계속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해방이후는 YWCA행사가 있을때마다 여러가지 형태로 연극행사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연극공부를 한 필자는 즐거운 마음과 감사한마음으로 효과있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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