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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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얼마전 저넉때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은 온통 30도를 넘는 여름의 무더위와는 다른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은 영화평론가 협회가 「한국영화의 재조명」을 위해 마련한 제1회 모임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한국영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명해 보자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다.
우리영화 60년은 그대로 민족수난과 운명을 같이해 왔기 때문에 해방전 작품이라고는 그 제명들만 남았을 뿐 필름은 편린조차도 찾을길 없고 해방 후 6·25까지의 작품도 제대로 보존돼있는 것은 거의 없고 보니 안타까움에 앞서 오늘율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 같아 민망스러울 따름이다.
이날밤 영화진흥공사의 협조를 얻어어 선정한 작품은 최인규감독의 『자유만세』(1946년작품)였는데 그나마도 전 9권중에서 보관돼 있는 것은 6권뿐이었고 게다가 자막·녹음·음악도 변조됐는가 하면 필름 연결도 잘안돼있는 만신창이었다.
이 자리에는 이 영화를 직접 제작했던 최완규씨(최인규 감독의 친형)가 화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와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한영모(촬영) 박용구(음악)씨 등 당시 이 영화에 참여했던 연고자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가진 이분들의 흥미진진한 회고담은 그대로 귀중한 자료로서 기록해 둘만한 얘기들이었다.
또 영화상영이 끝난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2시간 이상 일반 관람자와 관계자들과의 진지하고도 화기 넘치는 대화가 계속되어 「뿌리」를 정리하는 작업에 매우 고무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9시가 훨씬 넘어 시사실을 나오면서 시사실에서 받았던 감동과는 달리 일말의 부끄러움 비슷한 서운함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장내를 꽉 메운 관중은 거의 20대의 젊은영화 학도들 뿐, 거성 영화인의 모습은 관계자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우리영화인은 이러한 행사에 무관심하고 외면하기 일쑤일까.
젊은 영화학도들의 눈에는 이날 어떻게 비쳤을까.
영화법 개정에 쏟는 관심 못지않게 이러한 행사에도 열의를 갖고 적극 참여하는 자세가 아쉽다.
더군다나 우리영화 개척자중의 한분이었으며 영화사의 마지막 증인이기도 했던 이규환 감독마저 며칠전 타계하고 보니 이러한 아쉬움은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최금동
◇ 약력 ▲ 1916년7월3일 전남 완도출생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 ▲ 서울신문 사회부장·시나리오 분과위원장 등 역임 ▲ 공월문예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시나리오대상」등 수상 ▲ 대표작 『에밀례종』『삼일 독립운동』『8·15전야』등, 조계종 총무원 인사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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