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힘 '아파트에 도서관을 일구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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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공고를 붙여 장서를 기부 받았다.
될성푸른나무 도서관의 캐치프레이즈인 ‘우리 아이들, 마을이 함께 키웁니다’.

아파트 1층의 놀리던 공간이 엄마들의 힘으로 살아났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엄마들도 공부를 한다. 공간 기획, 운영 등 엄마들의 넓은 생각과 지혜로 탄생한 '될성푸른나무' 도서관 이야기.
시험 기간에는 아이 공부시키고, 아이 학교 보낸 후엔 엄마들이 요긴한 것도 배우고, 하교 후 아이들이 친구들과 소곤거리며 둘러앉아 책도 보고, 엄마 올 때까지 잠깐 아이도 맡아준다. 엄마들에게 필요한 이런 도움을 주는 곳이 있다.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두산위브 주상복합 아파트에 있는 될성푸른나무 도서관이다. 커피 마시다가 우연히 “우리 아파트 남아도는 공간 아깝지 않아요”라는 말로 시작해 2개월 만에 개관 행사까지 치러낸 도서관 건립 사건. 좋은 생각이 실현되기까지의 면면을 듣고 있자니 그 지혜와 에너지에서 역시 엄마들은 다르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1 유아들을 위해 앉아서 책을 볼 코너도 마련했다. 2 중학생들을 위한 독서실 책상도 놓여 있다. 3 포토샵 작업을 해서 프린트한 낙관에 어느 엄마가 신혼 때 쓰던 액자를 찾아와 그럴싸한 현판을 만들었다.

북적북적 주상복합 아파트
“여기는 옛날 동네 같아요. 만두 빚어 나눠 먹고, 서로 아이들 봐주고 그래요.” 두산위브 상가에 작업실이 있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오상화 씨가 기자에게 동네를 소개하며 꺼낸 말이다. 도시의 여느 아파트 생활을 떠올려보면 참 특별한 동네 풍경이다. 될성푸른나무 도서관의 전초전은 작년 가을 핼러윈 파티였다. 아이들만의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준비한 이벤트는 아이들의 친구, 친구의 친구, 인근 아파트 주민들까지 참여하는 동네 축제가 되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행여 어르신들이 시끄럽다고 항의하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되레 관심을 가지고 즐거워했고, 오가는 이들도 함께 즐겼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들이 준비한 행사 디테일이 프로급이다. “처음엔 우리 아이들만의 행사를 계획했는데 친구들도 초대하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음식량을 가늠하려고 인원 파악을 위해 쿠폰을 팔았어요.” 떡볶이, 순대볶음, 밥버거, 어묵 등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핼러윈 무드로 꾸며주고, 쑥스럽지만 엄마들도 서로 분장을 했다. 그래야 오는 사람들도, 주최 측도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상복합의 이점을 살려 가게도 섭외해 할인권을 받고, 참여 숍에 가면 아이들에게 ‘Trick & Treat’ 사탕을 주도록 사전 기획했다. 수익은 남지 않았지만 아이 키우는 문화를 보여주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이 실현된 행사였다.

4 개관 행사에서 선보인 삼행시를 전시한 창가. 5 한쪽 벽에 기부자 명단과 감사 멘트를 붙였다.
6 9월 20일에 열린 도서관 개관 축하 안내장. 타일 공예, 삼행시 짓기, 고무줄팔찌 만들기, 빅북 공연 등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리스트가 가득하다. 7 나무 주걱에 이름표를 달아 책자리표로 쓴다. 책을 뺀 자리에 끼워놓고 제자리에 꽂도록 하는 용도다. 8 운영일지. 사소한 내용도 메모하도록 해서 봉사자 간의 업무 인계를 돕는다.

엄마들의 지혜와 추진력
전직 유치원 교사, 잡지 기자, 행정 전문가 등 사회에서 한 역할하던 그녀들의 능력은 어느 곳에서나 반짝였다. 될성푸른나무 도서관 자리는 본래 중학생 독서실이었다. 그런데 오픈 기간 중 이용 학생은 3~5명 정도. 공간이 삭막해 막상 아이를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단지 내의 어린이 놀이방을 이용하는 엄마들을 보니 정작 아이를 놀리면서 엄마가 할 일이 없어 맹맹했다. 그래서 책도 보고 차도 마시고 공부도 시키는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만두를 빚어 먹던 엄마들은 서로 쿵짝이 맞아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도,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행사를 벌일 때도, 이 어마어마한 도서관 프로젝트도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일단 입주자 대표회의에 공간에 대한 건의를 해 사용 허가권을 받았다. 그런데 1개월 공간 사용료가 30만원이나 되었다. 생각해보니 ‘도서관 바람’을 일으킨 엄마들이 10명, 그럼 3만원씩만 내면 되니 커피값 아껴서 한번 해보기로 했다. 이런 좋은 공간을 얻어냈는데 사용료 때문에 접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막상 추진해보니 공간을 꾸밀 비용도 필요했다. 이번엔 10만원씩 기부금을 걷었다. 재밌는 것은 기부금을 내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후에 수익이 나면 계 타듯이 돌려주기로 한 점이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자금은 사용할 사람들에게 월 이용 회비를 연납으로 미리 내도록 했다. 그렇게 모은 기부금으로 공사를 시작, 이번엔 지나가는 이들도 십시일반 관심을 보이며 기부를 했다.

비용이 빠듯해서 아파트 비품 창고를 뒤져 쓸 만한 가구를 찾고, 온라인 가구 브랜드의 매장을 찾아가 할인을 받고, 친환경 페인트를 사다 엄마들이 칠했고, 어느 집의 신혼 때 쓰던 액자까지 가져와 알차게 활용했다. 개관 이후 아파트 보안실에서 수시로 전화가 오고, 주민들도 재활용장을 지나며 제보를 한다. 도서관에 쓸 만한 가구를 발견하면 너도나도 알려주는 것이다. 도서관은 봉사자들의 수고로 운영되고, 장서도 모두 기부로 채웠다. 시작은 몇몇이 했으나 이제 아파트 주민 모두가 함께 끌고 가는 도서관이다. 대학원에서 사회적 기업 공부를 하는 서은경 씨는 아무리 선한 뜻을 가지고 있어도 전달되지 않으면 오해를 산다며 주민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희가 시작했지만 저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했죠. 봉사자도 모두 같은 발언권을 가져요.” 주 1회 회의를 하고, 일지도 적고, 도서관 정관도 마련했다. “게시판에 붙은 자원봉사 공고를 보고 찾아왔어요. 행정 경험이 있던 저는 정관 서류 작업 등에 참여했어요. 선배인 제가 이런 걸 미리 도모했어야 하는데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직장을 퇴직한 이경랑 씨가 말한다.

될성푸른나무 도서관에서는 엄마들을 위한 부뚜막 강좌(요리)도 서로 해주고, 외부 강사 초빙, 아이와 어른을 위한 이벤트도 한다. 개관 행사 때도 케이크 만들기, 삼행시 짓기, 빅북 공연 등 ‘도서관에서 노~올자!’라는 콘셉트로 한판 신나게 놀았다. 개관 후 시험 기간에는 무려 30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용했고, 시험 기간 내내 초등학생 도서관 출입을 제한했더니 꼬마들이 형들 시험 끝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시간 들여 봉사를 한다기보다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 다닐 때처럼 뭔가 하고 있다는 기쁨, 일하던 시절의 에너지와 엄마가 되어 생긴 지혜가 더해져 이룬 도서관은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주변 엄마들에게도 짜릿한 자극이 되었다.

아파트 도서관 만들기 STEPS
1 아파트 1층 유명무실한 독서실 공간 사용 허가권을 얻다. 2 운영비 30만원을 나눠 내고, 기부금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마련하다. 3 주 1회 회의 정례화, 도서관 정관, 근무자 일지 등을 만들어 룰을 세우다. 4 가개관 과정을 거쳐 운영시간, 회비 등 개선점을 찾다. 아파트 주민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이용토록 하다. 5 주민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서 공고를 하고, 함께 참여하는 개관 행사를 준비하다.

기획=이지현 레몬트리 기자, 이나래(프리랜서), 사진=전택수(JEON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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