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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사람이 만들어” 해월의 가르침 배어있는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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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비학산 자락에 남아 있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옛 집터. 해월은 여기서 4년간 화전을 일구며 첫 법설을 폈다. [프리랜서 공정식]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가리라….’

 경북 포항에 세워진 ‘해월 최시형 선생님 말씀’이란 기념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1827~98)이 남긴 ‘대인접물’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고 있다.

 8일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온천 앞. 해월의 어록비는 온천 앞 밭둑에 세워져 있다. 해월 순도 100주년을 맞아 신광면 주민과 천도교가 그의 고향에 건립했다. 잡초에 덮인 어록비를 둘러보며 해월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주민 셋이 앞장을 섰다. 해월의 옛 집터가 있는 신광면 마북리 검곡(금등골)을 찾아가는 길이다.

 마북저수지를 지나 상수원 보호구역이 시작되는 곳에 차를 세우고 풀숲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상마북지에서 계곡이 시작된다. 낙엽이 바람에 비 오듯 흩날렸다. 1시간쯤 지나 계곡의 물막이보 옆으로 포항시가 세운 팻말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을 30m쯤 오르면 비학산 자락 해월의 옛 집터다. 산 속에 집터가 제법 널찍하다. 해월 당시에도 있었을 고목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화전을 일구며 살던 해월이 여기서 70리를 걸어가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돌아와 수행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해월은 반 종지 기름으로 스무하루를 밝혔다고 수운에게 밝힐 만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련에 몰입했다. 수도가 지극해 하늘의 말씀(天語)도 듣게 된다. 알고 보니 바로 수운이 한 말이었다. 해월은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영민하고 성실했다.

 1863년 수운은 해월에게 동학의 도통을 넘겼다. 해월의 나이 37세 때다. 그리고 흥해·영덕·영해 등 경주 북쪽 지역을 맡는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임명한다. 1866년 해월은 관에 쫓기면서도 제자들이 찾아오자 이곳에서 “적서와 귀천의 차별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첫 법설을 펴기도 했다.

 포항엔 해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검곡에서 10㎞쯤 떨어진 신광면 기일리에는 해월이 동학에 입도하기 전 일했던 제지소 터가 있다. 닥나무로 종이가 만들어지면 해월은 종이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윤 교수는 “종이 일 덕분에 해월이 『동경대전』 등 동학의 경전을 목판으로 찍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제지소 인근 흥해읍 매산리에는 1862년 수운이 동학의 조직인 접주제를 처음 실시한 손봉조의 집도 있었다. 몇 사람이 모이면 ‘접(接)’이 되고 접이 모여 ‘포(包)’가 되는 생활·도덕·운동 공동 운명체였다. 해월이 지도한 동학농민혁명도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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