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작가 강준식 씨가 본 「소련 속의 교포실태」(2)망향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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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바로프스크 시의 도심을 거니노라면 5명에 1명 꼴로 우리와 다름없는 얼굴들을 만나지만 그들 모두가 한국인들은 아니다. 몽고계·만주 계·중국계 등도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어 나는 몇 번이고 말을 붙였다가 실패했다. 아마 그들 가운데는 분명 우리 핏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세들은 전혀 한국말을 못한다.
1세를 만나야만 될 텐데 이 곳에는 코리아타운 같은 한국인들의 집단촌락은 아직 형성돼 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다만 택시를 타고 30분쯤 교외로 빠져나간 자영농 주택지대에 한국인들이 좀 몰려있을 뿐 대부분은 시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다 . 수소문 끝에 발견한 곳이 바자르 (자유시장) . 새까맣게 그을은 한국인 아주머니들과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게 팬 한국노인들이 원주민들 틈에 섞여 빨간 무·파·상치·토마토 등의 채소를 팔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사할린에서 이사한 사람들이며 남한출신들이다.
세 번씩이나 이 바자르를 찾아갔는데도 누구 하나 나를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아주머니는 없었다. 아주 반가와 들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신분을 두려워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한 아주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진 찍고 허는 거 내무서 허락 받고 허는거여. 그라지 않으믄 낭중에 우리가 씨끄 러워지 니께… 』
1978년에 사할린의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이주해 왔다는 50대의 이 아주머니는 80년 여름 하바로프스크의 한국인사회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을 설명했다.
그것은 북한노무자의 탈출사건이었다. 하바로프스크 북방의 삼림에는 약2만5천명의 북한 노무자들이 벌목 용역으로 와 있다. 이들은 집단수용소에 기숙하며 벌채한 원목을 70%는 소련정부에 바치고 나머지 30%는 북한으로 반입시키는 일을 한다. 「산판」이라 불리는 이 벌목장의 생활은 비참하다. 옷차림이 남루하여 하바로프스크 시내에서 이따금 그들 존재가 눈에 띄면 소련인 들이 볼까봐 민망스럽다고 교포들은 말한다.
고된 작업에 시달리던 한 북한 청년이 산판으로 돌아가지 않고 교포가정을 찾아와 숨겨줄 것을 요청했다. 딱한 사정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교포들 몇 집은 돌아가며 이 젊은이를 배불리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이 청년은 체포되었으며, 숨겨준 교포가정들은 내무서의 혹심한 수사에 몇 달 동안이나 시달렸다는 것이다.『그러나 저는 사정이 다르지요, 아주머니.』『그랴도 두렵소, 두려워』
옆에서 장사하던 한국인 아주머니들도 덩달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좀 더 많은 한국인들과 접촉해보고 싶다는 내 요청에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나에 대한 냉담과 비 협조는 단지생활이 몰고 간 일종의 반어법 같은 것이었다. 이 같은 경계심의 살갗을 한 꺼풀 벗기면 뜨거운 눈물과 사랑과 고향생각이 뒤범벅되어 있다는 것을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있으십니까?』
「마, 인제 아끼라메짯다(단념했다).
돌아갈라꼬 집 팔고 뭐 팔고 그러다 정신병자로 갇힌 집도 있고 예, 일가족전부 북송된 집도 있어 예….까딱하믄 망하는 기라…. 내사 여기서 죽어야지, 야아….】
그렇게 말하는 박이라는 경상도 아주머니(홀름스크시 출신)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괴었다. 교포들은 대체로 생활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어 적어도 의식주에 큰 걱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을 조국과 가장 밀착시켜 놓을 수 있는 화제는 역시 고향얘기다. 그래서 많은 교포들이 고향에 돌아 갈 수만 있다면 지난 37년 동안 쌓아 올린 생활기반과 소련국적을 언제라도 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장 감격해하는 이야기는 우후죽순처럼 빌딩이 솟은 서울의 발전상이 아니라 경북구미출신 최모 씨(50)의 경우처럼 고향구미에 공업단지가 서고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구체적인 화제였다.
고향이야기에 이르면 남한출신의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잘 울었다. 내 손을 붙들고 놓지 않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말할 수 없이 거친 손으로….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그리는 이들의 아픔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꿈에 고향이 보일까봐 비오는 밤이면 머리맡에 시퍼런 부엌칼을 두고 잠든다는 경북 선산출신의 정이남 씨 (59) 도 있었다 .갈 수 없는 고향…차라리 꿈에 보이지나 말라는 것이다.
2년만 일해서 고향의 논밭을 살 돈만 모이면 돌아오겠다고 꽃다운 아내에게 다짐하고 떠난 것이 어언 40년-. 그래서 교포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노래의 하나는 은방울 자매가 취입한『타향살이』였다. 가수로는 이미자가 가장 유명하다 하춘화·혜은이·조용필도 그들에게는 잘 알려진 가수다. 어쩌다 한국에서 온 원판이 한 장 입수되면 그걸 카세트에 복사하고 또 복사의 복사를 해 한국의 가요들은 전파되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오던 전날 밤,「88올림픽」때는 서울방문이 허락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좌중에서 나오자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말하던 김모 씨가 한참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어 살펴보았더니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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