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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반민특위(1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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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은 대통령이 『내가 지시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런 난폭한 습격을 지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은 사건직후 장경근 내무차관을 불렀다.

<무슨 이유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나><반민특위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하는 폐단이 많습니다><증거가 뭐야><공산당 때려잡는 사람을 잡아들이고 있읍니다. 최운하는 이문원 의원을 체포한 사람입니다><국회 안에 남로당 푸락치가 있나><검찰에서 이달 안에 수사를 끝내겠다고 합니다><국회의원일지라도 공산주의와 손잡고 있다면 잡아들여야지….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해야해…> 이런 회고는 다른 증언들에서도 뒷받침된다.
△최대교씨(당시 서울지검장) 『이 대통령의 지시라기보다는 대통령의 뜻을 헤아린 김태선 시경국장이 습격을 지시하고 지휘했다고 본다. 당시 노덕술 전 서울시경 사찰과장이 체포된 뒤 노씨에게 호위경찰까지 배치한 김태선 시경국장을 검찰은 범인은닉죄로 검거하려 했으나 대통령의 비호를 받고있어 손대지 못했다. 당시 김씨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김효석 내무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을 만났다. 최 사찰과장이 체포되자 그도 위협을 느껴 일을 서두른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김태선씨 (당시 시경국장) 『특경대는 경찰이 아닌데도 경찰권을 행사해 정부에서 해산시키라는 지시는 그전부터 있었다. 경찰은 특경대원을 체포한 것이지 습격한 것은 아니다.』
△정호완씨(당시 반민특위 경북지구 조사관) 『특경대는 반민특위위원의 경호도 겸할 목적으로 경찰이 파견한 경찰관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경찰권 행사는 불법이 아니었다.』
△선우종원씨(당시 법무부 검찰과장) 『경찰에선 특경대원으로서 경찰을 파견한 일은 없다. 따라서 특경대의 경찰권 행사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해산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나는 알고있다.』
어쨌든 사건의 충격파는 컸다. 여론은 정부 성토로 들끓었다. 국회는 △내각의 총퇴진 △내무장관 등 관계자의 파면 △특경대의 원상회복을 결의하고 이들 3개항이 관철될 때까지 정부가 제안한 모든 의안의 심의 보이코트를 결의했다.
그러나 그후의 사태는 국회쪽에 불리하게 전개돼나갔다.
우선 정부의 사태수습이 재빨랐다. 중재자는 바로 그날 법무장관으로 승진 발령된 권승렬 검찰총장.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을 겸직하고 있던 권 총장은 그날 저녁 최운하 총경과 권응선 경위를 석방했다. 경찰도 특경대의 비위사실을 문제삼지 않고 모두 석방했다.
그런 얼마뒤 국회가 휴회에 들어가자 국회 푸락치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수사당국은 소장파의 리더였던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서용길 강욱중 신성균 김택주 박윤원 김병회 황윤호 배중혁 등 10명의 국회의원을 구속했다.
6월6일엔 소장파의 배경이자 지주였던 김구 선생이 현역군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국회 푸락치사건의 확대에도 의혹이 많듯 이 김구 암살사건에도 억측이 뒤따랐다. 당시 서울지검장이던 최대교씨의 회고.
『권 법무부장관과 함께 공덕동 신성모 국방장관의 집을 찾아가자 아프다고 누워있던 신 장관이 벌떡 일어나며 <이제는 민주주의가 됐지>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공산주의자들과 김구를 제거했으니 다 되지 않았냐는 뜻 같았다.』
이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무렵 이 대통령도 김구씨와 일부 국회의원들의 행동을 몹시 위험시했던 것은 그의 극비서한에 나타나있다.
보좌관 올리버에게 보낸 6월28일자 극비서한. 『국회내 소수의 친공분자와 반미분자들은 한편으론 한국독립당과 다른 한편으론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정부의 입장을 악화시키는 모든 일을 획책했다.
로버츠 장군은 3명의 친공의원 체포가 대통령명령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범죄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김구씨 암살사건이다. 그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남한전역에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단체들을 조직하는 한편 내년6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자기 지지자를 당선시키려고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선동을 하고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뭏든 국회의원 검거선풍과 김구씨 암살은 국회내 소장파의 기를 꺾어놓았다. 국회가 다시 열린 7월7일 법무장관직을 떠나 국회로 돌아온 이인 의원은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8월3l일로 끝내도록 하는 개정법안을 제안했고, 무난히 통과됐다. 뒤따라 거의 기능을 잃어버린 반민특위 위원들이 모두 사표를 냈다.
새로이 구성된 반민특위 위원장은 반민법을 비토하자고 했던 이인 전 법무. 그의 회고로 그후의 반민법 처리를 들어보자.
『법무장관을 사임하고 국회로 돌아오자 첫 업무가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다. 내가 완강히 거절하자 신익희 의장까지 찾아와 <반민법 때문에 국회는 물론, 국가체면도 말이 아니다>라면서 수락을 간청해 끝내 뿌리칠 수 없었다. 새로 선출된 위원들은 회의를 열어 처벌은 최소 선에 그치고 관대하게 다룰 것이라는 운영지침을 성명1호로 발표했다.』
새 반민특위는 「관대」라는 방침그대로 더 이상의 체포는 하지 않았다. 이미 입건돼 기소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대」라는 방침의 재조사를 했다. 그리고 특별검찰부의 이런 재조사와 기소기간이 만료되는 9월20일을 기해 모든 반민특위 부속기구도 해체토록 했다.
완전히 선회해버린 친일파 처리방향은 반민특위 해체의 날의 이인 위원장 담화에 잘 나타나 있다.
『반민특위의 사업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 달라 용두사미로 그친다는 비난의 소리도 높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기도 아니고 너무 세밀히 한다고 불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심했던 자만 처단하고 나머지는 관대히 처리해서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도리다.
사람을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민주정신을 징계하려는 것이니 이 정도로 이일징백의 효과를 거두어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 38선이 그대로 있고, 시국이 혼란하고, 인재가 부족한 이때 반민족행위 처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민족과 국가를 위함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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