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 캄연정의 세 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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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왕→주석→망명생활 거친 국제외교무대의 재주꾼-시아누크 대통령>
캄보디아의 반 베트남3대 세력연정구성협정에 따라 민주 캄푸체아 연정의 새 대통령이 될 전 국가주석 「노로돔·시아누크」공은 널리 알려진 인물로 베트남군 철수를 위해 국제외교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캄보디아 내의 유일한 정치인이다.
북경과 평양에서 망명생활을 해오면서 종종『캄보디아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그는 이제 고국으로 귀환,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있다.
60개 고개에 있는 「시아누크」공의 생애야말로 조국 캄보디아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일제점령 하에서 약관 20세로 캄보디아 국왕 이 된 그는 프랑스식민지에서 해방된 45년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오랜 정치·외교투쟁을 시작했다.
55년 군주정치의 제약에 불만을 느낀 그는 부친의 승낙을 얻어 국왕 직을 버리고 정당을 설립, 5년 후 부친사망과 함께 국가주석이 됐다.
60년대 베트남전쟁 중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는 중립적 위치를 견지했으나 결국 70년 캄보디아 내 베트공 준동에 불만을 품은 친미장성들에 의해 축출, 북경에서 외로운 망명생활을 보내야했다.

<악명 높은 동족학살의 장본인…소르본대학 경박학위-키우·삼판 부통령>
새로 출범하는 민주 캄푸체아 연정의 부통령으로 지명된「키우.삼판」(50)은 수십 만 명의 동족학살에 책임이 있는 크메르루지 정권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외교관들은 지적하고 있다.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키우·삼판」은 크메르 루지가 캄보디아의 전권을 장악, 민주 캄푸체아 정부를 수립한 3년6개월 동안 국가 원수 직을 맡았었다.
그는 이어 크메르루지가 베트남 군에 의해 프놈펜에서 축출돼 정글 속에서 반 베트남 게릴라 활동의 조직을 시작한 지난 79년 크메르루지의 지도자「폴·포토」를 대신, 민주 캄푸체아 정부의 수상으로 임명됐다.
「키우·삼판」은 일반적으로 크메르루지로 알려진 캄보디아공산당과 초기부터 연관을 맺고있음에도 불구, 크메르 루지의 약 4명의 최고지도자들 중에도 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2선에서 당 이론가와 국가원수로 활약해왔다.
크메르 루지의 흥망성쇠를 추적해온 외교관들은「키우·삼판」이 초기의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 등 때문에 공산당의 실권자로 잘못 알려졌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민주당을 창당한 7순의 크메르루지 지도자-손·산 수상>
민주 캄푸체아 연정의 수상이 된「손산」은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KPNLF)의 지도자.
72세의 고령으로 깡마른 체구의 그는 베트남에서 태어나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46년 캄보디아 제4차 내각의 재무상이 됐다.
캄보디아 민주당의 창당멤버인 그는「시아누크」공 추종세력에 가담한 후 58년 부수상과 외상에 취임했고 이어 67년 중반∼68년1월 사이 수상을 지냈다.
그는 월남전화 해가는 국내소요 사태와 관련, 정치적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1년 파리로 갔다.
79년1월 베트남군의 캄보디아침공으로 크메르 루지정권이 붕괴된 후 그는 타이·캄보디아국경으로 돌아와 KPNLF를 창설했으며 80년 중반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독실한 불교신자인「손·산」전 수상은『덕망 높고 아주 완고하지만 특별히 카리스마적이지는 않은 인물』로 방콕의 한 서방외교관은 지적했다.
이 외교관은「손·산」이 캄보디아 국내에서는 그렇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라면서 그 이유로 KPNLF가 자체방송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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