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본대로 들은 대로...김재혁 전 특파원|아이들 기피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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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고장과 풍습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이 뭐랄 수는 없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귀여운 어린이들을 무슨 공해쯤으로 본대서야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어린이를 질색으로 여기는 미국사람들이 꽤나 많고, 그런 저런 이유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자녀들을 가진 외국인이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큰 도시에서 짐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당해보지 앉으면 모른다. 요즘 같으면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 가 일대, 뉴욕 퀸즈 지구의 플러싱에 코리언타운이 대규모로 형성돼있어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 무던히도 괄시를 받았다.
아파트의 빈방 광고에는 거의 예외 없이 어린이가 딸리면 안 된다(No kids)는 단서가 붙어있다. 설명하면 통하겠지 하고 관리인을 만나보면 첫마디가 자녀가 있느냐는 것이다. 있다하면 군 말없이 막자라서 『노』하고 돌아선다. 당신은 자녀가 없느냐고 되받으면『우리 아파트의 임대규정이 그렇다』고 나온다. 이 경우 「규정」은 영어로 「폴리시」(polycy)다. 미국사람들은 무엇을 거절하거나 마지막 말을 할 때 곧잘 『폴리시』를 들먹인다. 그 말이 나오면 흥정은 대개 끝장이다.
뉴욕근교에서 어떤 한국 교포가 당했던 일이다. 4년 전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함께 이민한 그는 하도 여러 차례 거절당한 나머지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침실 1개, 거실 1개 짜리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며칠이나 지나서 아들을 하나씩 몰래 데려왔다. 관리인의 추궁에 처음에는 잠시 다니러온 조카들이라고 우겼으나 마침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 그동안 후한 팁을 집어주고 인심을 얻었던 덕택에 쫓겨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에도 팁 생각이 날 때마다 가족 네 사람이 어떻게 침실하나에서 사느냐고 엇비뚜름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어린이들이 푸대접받는 까닭은 울거나 떠들어서 시끄럽다는 것과 집 안팎을 낙서 질로 더럽히거나 나무, 화초를 마구 꺾어 환경을 파괴한다는 때문이다. 동양인이라서 차별 받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미국사람 끼리도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도 없다.
뉴욕 등 큰 도시에서는 18세 이하의 자녀동거가 철저히 배제되는 아파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린이 출입금지 아파트다. 55세 이상만 입주시키고있는 뉴욕의「빌라」아파트는『어린이로부터 해방된 오아시스』임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어린이』란 말이 조용한 주거환경을 파괴하는「작은 악마」나 「공해」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동네 어린이들도 이 아파트에 접근하는 것을 아주 위험하게 생각한다. 어쩌다가 야구공이 아파트 정원에 떨어져도 꺼내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빌라 아파트에도 매주 토요일 낮에는 18세 이하의 자녀나 손자들의 방문이 허용된다. 그러나 『애들을 만나서 반갑긴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그 애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라는 「낸시, 클라크」 부인의 말처럼 어린이들은 기피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나는 애들이 싫다』고 솔직히 털어놨고, 다른 사람은 어린이를 사랑하지만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관리인 「캐럴, 개그년」여인은 『우리 아파트 2백80여 입주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생활방식을 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낮 동안에 학생들에게 둘려 싸여 시끌벅적하게 지내야하는 학교선생님들로부터 입주신청이 잇달고 있다는 실정이다.
어린 자녀와의 동거를 피하는 주거형태(child-free community) 는 원래 플로리다주나 애리조나주 같은 은퇴노령자를 위한 휴양지에서 비롯되어 요즘에는 미국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어린이 출입금지 박물관, 영화관, 식당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출입금지까지는 못해도 어린이와 동반부모에게 노골적으로 눈총을 주는 식당도 많다.
어린 자녀가 딸리면 귀찮다는 젊은 층도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 내 5천7백80여만 가구 가운데 자녀를 전혀 가지지 않은 가정이 무려 2천7백43만 여 가구(47.5%)나 되고 법적으로 결혼적령기를 지나고도 독신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8백98만 여명(11.6%)에 이른다.
도심지에서 진을 쳤던 독신남녀들은 요즘에는 교외로 나가 그들만의 독신자 촌을 이루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욕 시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웨스트 체스터 군과 페어필드군의 「코퍼레이트, 벨튼(Cor-porate)의 독신자 촌이 꼽힌다. 일대 11개 소읍에 유니언카바이드, 제너럴 푸드 등 미국 유수의 기업체 2백여 개가 밀집해있다.
이 일대에서 21세 이상 34세까지의 젊은이들은 8만3천 여명인데 그중 절반정도가 독신이다. 많은 독신 남녀들은『이 좋은 세상을 나 혼자 즐기기에도 바쁜데 거추장스럽게 아기를 왜 낳느냐』면서 결혼 같은 형식을 거부한다. 그들의 필독잡지「데이트 북」을 보면 디스코 파티에서부터 독서회에 이르기까지 매달 8백 건 이상의 독신자대상 행사가 벌어진다.
노년층은 그들끼리 조용히 즐기기 위해서, 일부 젊은 층은 그들대로 인생을 엔조이하기에 바쁜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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