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는 '갈팡질팡 정책 전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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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경기도에는 모두 150만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분당 신도시(9만7600가구) 15개 이상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그러나 지금 경기도에서 분당.일산만큼 계획적인 신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현규 경기개발연구원장은 "늘어나는 주택 수요에 맞춰 어차피 10년 동안 경기도에 150만 가구의 아파트를 지을 계획이었다면 분당과 일산 같은 도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좋은 도시 15개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후반부터 준농림지를 이용한 소규모 민간 개발이나 '미니 신도시'란 이름 아래 소규모 마구잡이 개발이 수없이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도로.학교.공원 등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서울 강남 등은 수요가 몰려 집값 급등의 진원지가 됐다.

고급 주거지의 부족은 ▶큰 그림이 없는 지방자치단체 ▶권리를 앞세운 땅 주인의 이기주의 ▶이익에 급급한 건설업체 등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품질 좋은 주택을 공급할 책임이 있으면서도 상황논리에 휘둘려 중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일 열리는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판교 개발 방향을 포함한 주택공급 확대 방안을 논의할 때 이런 점을 각별히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 수시로 바뀐 판교 정책= 판교 신도시는 '갈팡질팡' 부동산정책의 전형이다. 판교 개발의 초점이 마구잡이 개발 방지→과밀 억제→집값 안정→무주택자 주거안정→환경보호 등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집값 안정을 위한 '공영개발론'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최종 개발 방향은 아직 안개 속이다.

판교 개발의 공론화는 2000년 10월 10일 국토연구원이 개발안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는 아파트 등 주택 4만6000가구를 지어 인구 14만 명을 수용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판교 지역의 건축허가 제한이 2001년 말로 끝나 그대로 놔둘 경우 용인처럼 마구잡이 개발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2001년 9월 개발하기로 최종 확정했다.

개발이 확정된 뒤에는 몇 가구를 짓고 언제 분양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수도권 집중과 교통난 가중 등을 들어 당시 민주당 일부와 환경단체에서는 판교 개발에 부정적이었다. 정부는 2001년 9월 1만9700가구만 짓는 저밀도 도시로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2년 들어 집값이 급등하면서 사정이 또 달라졌다. 강남 대체 주거지로 개발해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토연구원은 2003년 3월 공청회에서 판교 가구수를 1만 가구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논란 끝에 정부는 2003년 말 개발계획에서 40평 이상 대형 평형이 적다는 여론과 청약예금 가입자수 등을 감안해 25.7평 이상 아파트를 6800가구에서 7374가구로 늘렸다.

1년 뒤 나온 실시계획은 평형별 배치 가구수에 큰 변화가 없었으나 임대주택을 5940가구에서 1만661가구로 늘렸다. 참여정부의 임대주택 확대 정책에 따른 것이다. 5월에는 개발밀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환경부의 반발로 판교 공급가구수를 2만9700가구보다 2896가구(9.8%) 적은 2만6804가구로 줄였다. 공급 축소는 올 들어 급등한 집값을 더욱 부추겼다. 급기야 정부는 25.7평 이하 택지까지 건설업체 등에 매각해 놓고 판교 개발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박사는 "판교는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관심도 많은 요지인 만큼 처음부터 고급주거단지로 조성할지, 중상위층의 내집마련 수요를 충족시킬 곳으로 개발할지 등을 명확히 한 뒤 손댔어야 했다"고 말했다.

◆ 안정적 공급 확신 심어줘야=정부의 '갈팡질팡 정책'은 신도시뿐 아니라 재건축에서도 나타난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재건축을 장려하고 집값이 뛰면 이런저런 이유로 재건축을 억눌렀다. 그러다 보니 도시계획을 세워놓고 재건축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장 상황에 맞춰 도시계획을 바꾸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니 국민이 정부의 정책을 믿지 않는다.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3일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가볍게 여겨지는 현상이 있다"고 토로할 정도다. 고종완 RE멤버스 대표는 "집값을 중장기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선 수요 억제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재건축.재개발.리모델링의 활성화, 강남권 대체 신도시 건설 등 안정적 공급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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