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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2)<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60)|홍수환|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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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l974년7월4일 새벽 지구의 저쪽 남아프리카의 더반시 에서 홍수환은 승전보를 전해왔다. WBA밴텀급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66년 김기수에 이어 실로 8년만에 한국프로복싱이 차지한 감격적인 세계타이틀이었다. 홍수환은 이후 숱한 화제를 뿌리며 풍운아로 일세를 풍미한다. 또 그는 사전오기의 신화를 참조하며 WBA주니어페더급 타이틀마저 획득, 국내에선 전무후무한 2개 체급의 세계타이틀제패라는 새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가족 고향은 평북 신의주다. 아버지 홍경섭(67년 작고) 어머니 황농선은 그의 힘과 두 누이 등 3남매를 데리고 해방직후인 46년 월남, 성북구 돈암동에 정착했다. 홍수환은 6·25사변이 일어난 지 나흘 뒤인 50년 6월29일 태어났다. 이후 동생들이 더 태어나 그는 4남3녀 중 꼭 가운데가 된다.
그가 권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종로구 내수동에 살던 중앙고 1학년 때다. 앞에서 이미 잠깐 기술됐었지만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김준호란 좋은 트레이너를 만나게 됐다. IQ가 1백30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그는 공부도 잘했으며 스포츠는 물론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복서로서 순조로운 출발은 하지 못했다. 고교2학년 때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 출전했으나 초반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는 고교를 졸업한 직후인 69년5월 프로에 데뷔, 첫4회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2년 후인 51년8월 문정호를 4회 KO로 누이고 한국밴텀급챔피언이 됐다.
이듬해 6월 필리핀의 「알·디아스」를 판정으로 제압하고 동양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의 세계 도전은 뉴욕의 프러모터인 「듀이·프라게타」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라게타」는 이보다 4개월 전에 벌어진 이창길과「세르반테스의 세계타이틀 건도 주선해준 장본인이다.
남아프리카의 챔피언 「아널드·테일러」측은 당시 WBA8위인 동양챔피언 홍수환을 스파링 정도의 상대로 가볍게 알았다. 이것이「테일러」에겐 비극을. 홍수환에겐 행운을 갖다 줬다. 한술 더 떠 「테일리」측은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소위 옵션(이면약정)이란 괴물(?) 도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8천 달러의 대전료를 받기로 한 홍수환과 트레이너 김준호는 7월3일 밤의 대전을 보름 앞두고 더반에 뛰어들었다. 아무도 그의 승리를 예측 못한 터인지 공항엔 이들에게 환송 나온 인사들이 없었다. 찌는 듯한 서울의 밤은 이들에겐 더욱 숨이 막혔다. 수십 시간의 비행기 여행 끝에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항구도시 더반에 도착했다. 더반은 한국과 달리 초가을의 서늘한 날씨로 홍수환의 투쟁의식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그는 투숙한 비치호텔에서 평생의 은인을 만나게 된다. 이 호텔의 40세가 조금 넘은 「해리곤」이란 사장은 도전자가 투숙한 것에 대해 더 없는 영광으로 흥분했다.
따라서 「해리곤」과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숙해졌다. 하루는 김준호가 그에게 「테일러」의 경기필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안되면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한번 해본 것이다. 그런데 이틀 후 그는 16m 필름과 영사기마저 구해와 호텔 방에서 몰래 보여주는 것이었다.
필름을 검토해본 김 트레이너와 홍 선수는 쾌재를 불렀다. 그들은「해리 곤」이 돌아간 뒤 너무 기쁜 나머지 트위스트를 신나게 한바탕 춘 뒤 챔피언이 되면 링 위에서 또다시 트위스트를 추자고 약속했다.「테일러」는 좌우 훅이 위력적인데 유리 턱이란 결정적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테일러」가 「아나야」(멕시코)로부터 타이틀을 따올 때의 대건 필름인데 「테일러」는 놀랍게도 6차례나 다운되고 13회 역전KO승을 거두는 것이었다. 7월3일 밤 야구장인 웨슬리지파크 스타디움에는2만 관중이 몰려들었다. 한국 선원 3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을 열심히 했다.
승리를 자신한 홍수환은 처음부터「테일러」턱을 집중 공략해 1,14,15,라운드에서 다운을 뺏는 등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4회 이후엔「테일러」가 계속 홀딩, 김준호는 남아프리카 주심에게 계속 항의했다. 경기가 끝나고도 흠디시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하고 조마조마한 순간 『뉴 챔퍼언…』라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링 한가운데로 달려나가 서로 끌어안은 뒤 약속대로 신나게 트위스트를 추어댔다.
그러나 챔피언 홍도 왼쪽 귀가 많이 찢어져 병원으로 달려가 9바늘이나 꿰매는 곤욕을 치렀다. 호텔로 돌아오자 20여명의 여성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숫제 방으로 쫓아와 나가질 않았다.
김 트레이너는『우리는 피곤하다. 자야겠다』며 나가달라고 애원했을 정도다.
더반에서 4일 동안 머무른 홍 선수와 김 트레이너는 뉴욕, 하와이, 동경을 거쳐 7월15일 귀국했다. 공항에서의 환영 식에 이어 카퍼레이드를 벌인 홍 선수는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이었는데 사명으로 처음 부대장병들의 사열을 받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7월18일 홍 선수를 접견, 대통령 수장을 수여한 뒤 오찬을 베풀어 노고를 치하했다.
그러나 홍수환의 파란만장한 복싱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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