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가정일 을 함께 하려면 몇 개의 얼굴을 가져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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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얼마 전에 외국의 여가수 트리오가 내한하여 벌인 쇼 무대를 TV로 본 일이 있다.
무대의 회전과 변화가 하도 빠르고 다양해서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수십 분이 흐르고, 무대는 막을 내렸다.
한사람씩 나와서 한 곡씩 완성하여 부르는 유창한 재래식 리사이틀이 아니라 노래를 토막토막 갈라서 다른 요사이 노래에다 접을 붙여 부르는데, 토막노래가 바뀔 때마다 가수가 바뀌고 분위기도 바뀐다. 한사람씩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무대로 등장하는 시간을 빼면 불과 몇 분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머리모양도 바뀌고, 의상도 달라져서 전체적으로 무대가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노래의 템포가 빠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이른 아침,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겨주고 양념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손으로 크림을 찍어 바르고 옷을 갈아입곤 부지런히 집을 뛰어 나올 때마다 다양한 얼굴로 무대에 등장하던 그 가수들을 문득 생각하곤 한다.
가정과 직업을 함께 갖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양면의 얼굴을 갖는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한편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끝내 배우는 일이기도 한 탓에 가르친다고 하는 직업자체에도 양면성이 있는 듯하다. 한 장도 책을 젖혀보지 못 한 채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태반이면서도, 내 몸 가는 대로 책을 옮겨 놓아야 마음이 놓이니, 이는 곧 숙제를 다 못한 불안한 학생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그러기에 50줄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몹시 피곤한 날에는 어김없이 시험장에 들어가서 알쏭달쏭한 문제를 앞에 두고 진땀을 빼는 꿈을 꾸곤 하는가 보다.
공부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하나인 것 같으나 그것이 많은 정력과 시간을 요구하는데 있어서는 완전히 둘이기 때문이다.
하루 일을 밖에서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 역할을 기대하는 나의 무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두 분이 다 세상을 떠나셨지만 얼마 전 까지 만해도 내가 모셨던 두 노모 님에게 있어 나는 단지 두 분의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드리는 딸이고 며느리였어야 했다.
모 저마다 따스한 손길을 요구하는 여섯 개의 눈망울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남편에게 있어서는 그의 구미에 따라 오밤중에라도 밤참을 마련해야 하는 마누라로 탈바꿈해야한다. 2층으로, 아래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역할을 바꾸는 나의 생활은 집안에만 한 점하여 생각하더라도 이만저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아들·딸들이 장성했으니 얼마 안되어 나에게는 장모와 시어머니 역까지 부과될 것이다. 머지 않아 또 다른 얼굴로 변신해야 할 준비도 채 하기 전에 새로운 역이 주어질까 갑자기 초조하고 불안해짐은 왜 일까.
나는 3년 전에 두 번째로 독일에 간 적이 있었다.
주어진 일과, 집과, 깊이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떠나서 오로지 공부하는 일한 가지밖에 주어지지 않는 그동안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저녁 놀 속에 숲 속으로 난 산책로를 그토록 느긋한 마음으로 걸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머리와 가슴과 마음을 채우기 위해 온 시간을 쓸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을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 그리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지금도 종종 회상하곤 한다.
귀국한 후 나는 다시 내가 속해 있었던 것들 속으로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또 다른 가르친다는 입장의 얼굴로 벅찬 생활의 연출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무대가 가정에서부터 사회로 옮아가 버린 현대에 있어 이러한 생활패턴은 교육받은 여성들이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해가 거듭되면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는 모습을 위한 보다 민첩한 숙달과 정열이 나에게 요청될 것이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이것 이 곧 일생 전문직에 종사하려하는 모든 여성들이 함께 겪어야 할 애환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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