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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8)제77화 4각의 혈투 60년(56)|김영기|이안사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 안사노는 강세철과 함께 부자복서로 유명하지만 은퇴 후엔 한 때 연예계에 종사하는 등 이색적인 복서다.
강세철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을 때 이 안사노는 프로에 데뷔 ,한국 미들급에 이어 동양 주니어 미들급까지 석권하는 행운을 안았다.
이는 당시 중량급에 이렇다 할 복서들이 없는 데다 김기수가 세계 타이틀을 노려 국내 타이틀을 반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세철-허버트 강 부자가 한국 프로 복싱 사에 화려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반면 이안사노-이이다노 부자 복서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 했다.
이안사노는 65년 7월3일 장충 체육관에서 벌어진 국내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강세철에게 10회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3월13일 동경에서 가진 동양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일본의 이우지따」를 역시 관점으로 제압, 강세철 김기수 강춘원(66년 1월·주니어페더급)에 이어 국내복서로 네 번째 동양 왕자로 탄생했다. 두 차례 경기가 모두 타이틀 결정전으로 그에겐 행운이라고 하겠다. 그의 본명은 이병태이며 안사노는 세례명이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금화였으나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한 뒤 파주 미군 부대에서 교환원으로 일하며 집안을 도왔다.
그는 이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동안 권투를 시작하게 됐고, 모 연예계와도 인연을 맺었는데 은퇴 후 연예계에 종사하게 된 계기도 이 때문이다. 그는 우연히 미군 친구의 권유로 고봉아가 세운 일성 체육관을 찾아 샌드백을 두드리게 됐다. 글러브를 낀지 3년 만인 58년 제1회 전국 아마 선수권대회에 출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엔 로마 올림픽 파견 4차 선발전에서 우승하는 등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가 프로에 데뷔한 것은 강세철의 권유로 60년 5월에 이루어졌다. 이 해 조성구의 타이틀 반납으로 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 강만오 이기선을 차례로 KO로 누인 뒤 결승에서 오정근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새 챔피언이 됐다. 이안사노는 이후 국내 미들급과 동양 주니어 미들급도 모두 챔피언 결정전에서 타이틀을 따내는 등 억세게 운 좋은 복서였다.
그러나 나는 이안사노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쌓았다. 62년 4월15일 이일호 프로모더 주최로 웰터급 챔피언 이안사노-함정일, 밴텀급 챔피언 이동춘-정국면 등 두 개의 국내 타이틀 매치가 서울 운동장 수영장에서 벌어지게 됐다. 그런데 포스터가 나붙고 경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안사노는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타이틀전을 취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가 강력한 도전자인 함의 도전을 피하려는 책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 권투위원회(KBC)총무부장이던 나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시합 당일 계체량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화양동 그의 집으로 달려가 링에 오를 수 없으면 관중 앞에서 사과 말이라도 해줄 것을 간청했다.
링 위에 오른 이안사노는 관중들의 야유에 화가 나자『여러분들은 몸이 아픈 내가 싸우다 죽으면 책임지겠느냐』고 엉뚱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관중들은『사기다』고 소리지르며 일대 소란을 일으켰다. 주최측은 2주일 후 이안사노-함정일의 타이틀전을 벌이겠으며 이 날 입장료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겨우 관중들의 소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이튿날 신문에 이 사실이 크게 보도되자 시경에서 조사에 착수, 급기야 이일호를 비롯하여 나와 김정복 사무국장 등 이 모두 구속되고 말았다. 사기 권투를 주최했다는 것이 구속 이유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4일만에 적부심사로 겨우 풀려 나왔다. 구속 사태를 당한 KBC도 크게 화가 났다. 이안사노에게 1년6개월 동안 정권처분을 내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이안사노는 해병대에 입대했고 64년 링에 복귀, 한 체급 위인 미들급으로 출전하여 연승을 거두며 이듬해 국내 챔피언이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어 그는 66년 동양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까지 차지, 인기를 한 몸에 모았으나 67년 일본 원정 경기에서 오른팔이 탈골되면서 복서의 생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그는 국내 타이틀은 68년 4월 최성갑에게 3회 TKO패로 뺏겼으며 동양 타이틀은 69년5월 3차 방어전에서 일본의「미조구찌」에게 4회TKO패를 당해 넘겨주고 말았다.
그는 이후 70년 4월 국내 미들급 타이를 결정전에서 김재천을 누르고 다시 타이틀을 차지, 결정전과는 깊은 인연을 갖게 됐다. 그는 71년 4월 유제두 와의 방어전에서 1회에 무참히 KO패 한 뒤 이 해 링을 떠났다. 은퇴 후 그는 LAS라는 혼혈아 중심의 보컬그룹을 구성, 연예계에서 맹활약했다. 또 그의 아들 이이다노는 역시 아마(14전승)를 거쳐 프로 복싱 계에 데뷔, 76년에 국내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까지 됐다.
이이다노는 링네임으로 이다노는 스페인에서 일세를 풍미한 불멸의 투우 이름이며 본명은 이정식이다. 이이다노는 백년3윌 라이트급 4강 전에서 오영호에게 3회 KO패한 뒤 가출소동을 빚은 끝에 이해 은퇴하고 말았다. 이안사노 부자는 지난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챔피언 카바레를 경영, 성업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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