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2)제77화 4각의 혈투 60년(50)|김영기|강세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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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해방을 전후하여 정복수가 한국프로 복싱의 대명사였듯이 50년대 후반기부터 60년대 초까지 프로복싱 계의 심벌은 강세철 이었다.
그러니까 강세철은 정복수 박형권 송방헌 김계윤 등 열강이 각축하는 중량급의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리자 마치 천하통일의 패왕과 같이 군림한 철권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세철이 일세를 풍미한 풍운아가 된 것은 한국최초의 동양챔피언(주니어 미들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6·25의 혼란이 수습되고 프로복싱계도 체제를 잡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미들급과 동양초대 주니어 미들급의 챔피언이 된 것은 다분히 시련을 탔다고도 할 수 있으나 여하튼 이 주먹의 왕자는 세인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 명사가 되었다.
그의 유명 도를 높인 또 하나의 요인은 둘째아들 허버트 강마저 불세출의 하드 펀치로 등장, 동양페더급 챔피언까지 오름으로써 동양에선 전무후무한 부자챔피언이라는 희귀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세철이 주먹의 정상에 올라 스타가 된 것은 57년 11월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한국미들급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송방헌을 10라운드 판정으로 누르고 챔피언벨트를 획득한 것이다.
한국권투위원회가 종합 평가한 역대 미들급 챔피언에 따르면 초대(46년)의 송방헌을 시작으로 김복규 오정근, 그리고 다시 송방헌으로 이어지는데 따라서 강세철은 제5대 한국미들급 챔피언이 된다.
이때 송방헌은 이미 나이 34세의 노쇠기, 사실상 복서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이므로 강세철의 챔피언십 획득은 자연스런 세습이나 다름없었다.
강세철의 당시 나이도 30세. 따라서 이 시기에 중량급에서 우수선수가 갑자기 공백상태를 이룬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 선수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30대 주먹의 위력」은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세철은 이보다 앞서 55년 10월에 웰터급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찬스를 아깝게 놓쳤다.
프로복싱 계의 재정비와 함께 시작된 첫 통합선수권대회에서 강세철은 노장 정복수와 대결했다. 이때 정복수는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엄밀한 평가를 했다면 노쇠한 정복수에 대해 한창때인 강세철이 당연히 이기는 경기였다. 그러나「예우 판정」이라 할까, 한국최초의 웰터급 통합선수권은 정복수에게 넘어갔다.
이 선수권전의 우승자인 챔피언들은 이듬해 마닐라 원정을 떠났는데 정복수는 이를 사양,강세철이 여행 티키트와 한국챔피언의 지위를 함께 양도받았다.
송방헌을 물리치기 직전, 강세철은 전 챔피언 오정근에게도 8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고 58년엔 유일한 라이벌 조성구 마저 10라운드 판정으로 눌러 국내에선 무적의 챔피언으로 독주를 거듭했다.
이해 밴텀급 이명근과 함께 해방 후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원정한 강세철은 일본심판들의 옹졸한 편파심판으로 일본 미들급 챔피언 신이팔낭에게 판정패했으나 59년 5월과 11월 당시 육군체육관(현 장충 체육관)에서 가진 태국의 웰터급 챔피언「판삭디」및 필리핀의 강자「영·폴리노」와의 시합에서 연승을 거두어 국내 팬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판삭디」와의 시합은 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태국군인들이「판삭디」의 판정패에 흥분, 한국관중들과 편싸움을 벌이는 소동을 일으켜 헌병들이 출동하는 등 불상사를 빚었던 화제의 이벤트였다.
강세철에게 최대의 행운이 찾아 든 것은 60년 11월.
이해 동양권투연맹(OBF)은 각 체급의 주니어 부를 신설, 따라서 주니어 미들급의 챔피언자리가 강세철의 몫으로 떨어진 것이다.
OBF는 이 체급 챔피언 결정전을 강세철과 필리핀의「러시·메이온」의 대결로 결정, 강세철의 노력이 주효하여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거행되었다.
시합시간이 하오2시 30분이었으나 11월20일 초겨울의 날씨는 차가웠다.
열대지방에서 온「러시·메이온」은 이미 날씨 때문에 잔뜩 움츠러들었고, 대성황을 이룬 4만여 명의 관중은 강세철의 승리를 굳게 믿었다.
이러한 기세대로 강세철은 훌륭한 액션을 연출했다. 3라운드부터 특유의 강력한 훅을「러시·메이온」의 턱과 옆구리에 작렬시킨 강세철은 5회1분25초만에 통쾌한 K0승을 거두었다.
최초의 동양주니어미들급 타이틀획득과 함께 강세철은 일약 링의 영웅이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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