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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권(恩赦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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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반란죄 등을 적용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또 두 사람에게 각각 2205억원 및 2628억원의 추징금도 확정했다.

같은 해 12월 22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수감 2년도 채 안된 두 사람을 특사로 풀어줬다. '국민 대통합'이 명분이었다. 무기와 17년의 징역은 8개월 만에 없었던 일이 돼 버렸다.

99년 7월. 세금포탈 등 혐의로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는 대법원에 상고취하서를 갑자기 제출했다. 항소심에서 내린 징역 2년의 판결이 확정돼 수감되는 듯 싶더니 광복절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판결 선고 후 형은 단 하루도 집행되지 못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민족 대화합' 을 위한 특사라고 했다.

사면이란 형벌권을 소멸시키거나 효력을 제한하는 국가 원수의 특권이다. 우리 헌법과 사면법에도 규정돼 있다. 역사적으로 전제군주의 은사권에서 비롯됐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법의 철학'에서 "군주의 주권에서 범죄자에 대한 은사권이 생긴다. 범죄를 무효화하는 위력을 실현하는 것은 오직 군주의 주권에 속한다"고 정의했다.

사면은 용서한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다.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은 90년대 후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반인륜적 인종차별주의(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를 극복하고 국가적 단합을 위해 사면을 진행했다. 그러나 대전제가 있었다. 자신의 범죄사실을 먼저 고백하고 참회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군사든, 권위든, 민주든 역대 정권은 갖가지 미명 아래 '사면 잔치'를 벌였다. 권력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제왕적 대통령'은 비리에 얽힌 정치인들에게 인심 쓰듯 은전을 베풀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려나 권력자의 자의에 의한 사면은 사법부의 위상을 왜곡한다. 대통령이 판.검사의 결정을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는 셈이다.

정부와 여권에서 사면이 거론되고 있다.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대상이란다. 충분히 참회했다고 판단한 것인가. 오늘도 전.노씨는 비자금을 숨겨둔 채 국민을 향해 재주껏 찾아보라며 버티고 있는데….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