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에겐 종이가 필요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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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처럼 종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스마트폰과 태블릿과 E-북 리더가 종이라는 플랫폼을 다 대체시킬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가 좋을지 나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1. 메모할 때
자기 개발서는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메모가 좋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메모는 성공의 비결이기 전에 내가 문자로 남긴 개인적인 지층이다. 잘 바래고 쉽게 낡고 더러워지기도 쉬운 종이의 특성 덕분에 우리는 메모를 통해 그 메모를 할 때가 몇 년 전쯤이었는지, 그때 뭘 먹다 흘렸는지 같은 추가적인 정보를 되살릴 수 있다. 메모장 앱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 파란 펜은 라미, 오렌지색과 검은색 메모 패드는 로디아.)

2. 공들여 글씨를 쓸 때
취향과 성향에 따라 어딘가에 뭔가를 쓰는 일은 품위 있는 여흥이 되기도 한다. 동양에 서예가 있다면 서양엔 만년필이 있다. 두툼하고 표면이 조금 거칠고 잉크를 잘 흡수하는 종이 위에 만년필로 뭔가 써 내려가는 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경험 중 하나다. 벨기에의 오리지널 크라운 밀스는 현재 가장 오래된 종이 회사다.
(종이 위의 만년필은 몽블랑, 옆에 있는 만년필은 라미.)

3. 카드나 엽서를 쓸 때
디지털화는 생활의 편리성을 많이 가져다준 대신 생활의 결을 많이 깎아냈다. 이제는 비행기가 착륙하면 바로 전화기를 켜서 안부를 전할 수 있지만 그 메시지에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지역성이 없다. 국제우편으로 온 미술관과 호텔과 도시와 항공사의 엽서에 묻어 있던 그 거리감이.

4. 종이 책을 읽을 때
디지털 문화 때문에 종이 책은 큰 위기에 놓였다. 종이 책이 철 지난 청바지의 촌스러운 실루엣 취급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터치스크린의 효율성으로는 종이 책의 다양한 판형을 재현할 수 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책의 끝이 다가온다는 직접적인 기분도,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른 세계가 열리는 설렘을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종이 책을 버릴 수가 없다.

5. 종이 정기간행물을 읽을 때
모든 종이 정기간행물은 더 큰 위기에 놓였다. 기자가 사라질 직업 목록에 오른 지도 꽤 됐다. 이 상황에서 ‘콘텐츠는 살아남는다’는 허무한 자위 대신 종이라는 플랫폼의 특장점을 되새기는 건 어떨까. 스크린보다 크지만 제한된 지면에 효율적이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특징을. 그 과정에서 이 장르 자체가 어떤 면에선 예술의 경지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6. 종이를 통해 기억할 때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되살리는 데에는 촉매가 필요하다. 그럴 때 종이는 종종 나만 아는 아주 내밀한 암호가 된다. 어떤 촉매와 엉키면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빛을 내며 되살아나기도 한다. 영수증이나 놀이공원 티켓, 항공권이나 콘서트 입장권, 축구 경기 입장권이나 다 쓴 여권 앞에서 그때의 세상과 내가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7. 닦을 때
우리는 평생 끊임없이 더럽히고 더럽혀지므로, 모든 종이가 사라져도 이 종이만은 남을 것이다.
(다양한 색의 티슈는 레노바.)

글=박찬용 젠틀맨 기자, 사진=이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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