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에서 영웅으로 춘향이 달라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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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호 06면

“이전의 춘향과 다르지 않을 거라면 내가 연출할 이유는 없다.”

국립창극단 세계거장시리즈 ‘다른 춘향’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유치원생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는 ‘춘향가’가 색다른 옷을 입는다. ‘20세기 최고의 연출가’로 칭송받아온 루마니아의 거장 안드레이 서반(71)의 ‘다른 춘향’(11월 20일~12월 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이다.

2년 전부터 국립창극단 ‘세계거장시리즈’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뜸을 들여온 그가 드디어 개막을 앞두고 5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으로 소문났지만 팥죽색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난 그는 아이처럼 농담을 섞어가며 친근함을 어필했다. 당초 제안받은 ‘흥부가’를 거절하고 ‘춘향가’로 바꾼 것에 대해 “흥부가에서는 늘 밥을 먹고 있더라.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날씬해 놀랍다”면서 “흥부전은 마음에 와닿지 않았지만 춘향은 매우 감성적인 이야기다. 우리가 연극을 하는 이유는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오늘이 오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으로서 한국인들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이야기에 위축되기도 했고, 두려움을 떨쳐내는 데 1년이 걸렸죠. 하지만 결론은 브로드웨이 쇼처럼 전석 매진을 목표로 합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겁니다.”

그의 주무기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대담한 실험성. 그 자신이 ‘가장 대담했던 작품’으로 꼽는 데뷔작 ‘줄리어스 시저’(1968)부터 일본 가부키의 무대와 모션을 차용해 연극 강국 루마니아를 충격에 빠트렸었다.

그런 만큼 ‘춘향’에서도 파격을 감행한다. 해피엔딩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춘향을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그리며, 오지 않는 몽룡을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몽룡은 고위 관료의 대학생 아들, 춘향은 가난한 아가씨로 설정했고, 향단이 없는 대신 방자를 여자가 맡는다. 대사와 연기는 현대적이지만 판소리 원형은 유지해 눈대목(판소리의 중요한 대목) ‘사랑가’ 등이 그대로 불린다.

“처음 영상을 봤을 때 너무 완벽한 상태라 어떻게 재해석할지 막막했죠. 하지만 연습을 하다보니 춘향이 셰익스피어와 비슷하더군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뒤집을 수 있는 열린 재료지만 어떻게 비틀어도 결국 절대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창극 배우들이 오페라 배우에 비견되는 특유의 기술을 갖고 있다고 평하면서도 ‘특별한 스타일을 가진 배우들이 틀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도전이었단다. 그런 면에서 그가 선택한 안무가 안은미의 활약이 컸단다. “안은미가 창극 배우들의 인위적인 움직임에 생명을 부여해 줬습니다. 말을 할 때나 몸을 쓸 때 판에 박힌 것에서 벗어나도록 분명하게 이끌더군요.”

무대는 검은 철골 구조물에 모래와 물을 가득 채우고 스크린을 세워 공연 내내 영상을 투사한다. 영상을 또 하나의 언어로 활용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오늘의 ‘현실’과 대비되는 ‘전통’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다른 스타일을 추구합니다. 나의 시그니처가 보이지 않게 하죠. 이번 프로덕션처럼 영상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도 결과물이 상당히 궁금합니다. 하지만 창조 작업에서는 불확실성이 중요해요.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다면 이미 죽은 것이죠. 끝까지 몰라야 됩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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