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영화] '천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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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이순신은 지금 눈으로 보면 늦깎이 취업 재수생이었다.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별과에 낙방했을 때 나이가 이미 스물여덟. 시험을 준비한 지 7년 가까운데다 처자식도 있는 몸이었다. 요즘의 공무원 임용고시와 달리 당시 정기시험인 식년무과는 3년에 한 번뿐이었다. 청년 백수의 설움이 어찌 오늘만의 일일까.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식년무과에 합격하기까지, 이순신은 혹 훗날 자신이 왜적의 침략에서 조선을 구하는 영웅이 되리란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속칭 삐딱선을 타면서 허랑방탕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천군(天軍)'은 이런 제법 발칙한 상상과 시간여행이라는 SF 장치를 결합한 영화다. 극중 2005년 현재 남북한은 압록강변의 군사기지에서 공동 개발한 핵탄두를 열강의 압력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북한군 소좌(김승우)는 이를 훔쳐내 공해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공동 개발에 참여했던 남한군 장교(황정민)는 어제의 동지를 사살하고 탄두를 되찾기 위해 그 뒤를 쫓는다. 때마침 지구에 접근한 혜성의 주기에 따라 양측 모두 433년 전인 1572년에 떨어진다. 변방의 백성들은 여진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청년 이순신(박중훈)은 무과에 낙방한 직후다. 현대의 병사들은 더벅머리 좀도둑처럼 보이는 청년의 호패에 적힌 이름 석 자가 바로 그 이순신이라는 데 경악한다.

개봉 전부터 홈페이지에는 이순신 장군을 희화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일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의 무게중심은 민족주의와 전쟁 스펙터클이다. '성웅 이순신'과 '백수 이순신'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희극적 요소를 충분히 펼치지 못한 채 80억대 예산의 이 대작 영화는 후반부 여진족과의 대결에 승부수를 건다.

중국에서 촬영한 전투장면은 협곡으로 적을 유인해 화공(火攻)으로 한 차례 공략한 뒤, 다시 평야에서 처절한 육박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실감난다. 때로는 너무 잔혹하고 처절해서 앞서 전반부에서 맛보이는 코미디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이런 전투장면이 대변하는 영화의 목소리는 단순하다 못해 도식적이다. 여진족이든, 왜적이든, 현대의 열강이든 '그들'일 따름인 외세 앞에서 남과 북은 하나라는 얘기다. 이순신은 어느새 남북 간의 갈등까지 무마하는 지도자로, 최첨단 현대군을 능가하는 탁월한 전략가로 등장한다.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은 청년 이순신의 4년 행적이나, 임진왜란 당시의 '신군(神軍)'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한 줄 서술에 주목한 제작진의 눈썰미는 뛰어났지만, 역사적 영웅의 무게까지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방황하는 청년 이순신도, 살 냄새 나는 인간 이순신도 미처 등장하지 못한 채 전장의 영웅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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