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불교의 사회 참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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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37년 2월27일 일제의 조선총독부 회의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빼앗은 네놈들은 곧 망할 것이다. 남차랑 총독의 주장에 동조한 사문 네놈들도 곧 망할 것이다. 남차랑을 동조하는 사문들 네놈들은 부처를 팔아먹은 도둑들이다』
만공선사가 한·일 불교합병을 위해 「미나미」총독이 소집한 한국불교 31본산주지 회의에서 토한 사자후다.
만공은 이내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비 학원에 머물렀다. 이날 밤 만해 한용운 선사는 비학원으로 포공을 찾아와『참으로 잘했다』는 찬사를 연발했다.
『만공, 할로 여우새끼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도다. 그런데 할도 좋았지만 그 무지한 놈들한테는 방을 들어 후려치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는가?』 만해의 찬사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포공은 조용한 한마디의 대답을 던졌다.
『이 좀스런 사람아, 어리석은 놈은 방망이(봉)를 쓰지만 사자는 일갈(갈)을 쓴다네. 어서 차나 한잔 들게.』
만해는 지혜의 보검이 비범함을 일러준 만공의 이 한 마디에 말문을 닫고 차를 마셨다.
포공선사의 이 같은 할은 비 불교의 「행동선」을 통한 사회참여의 한 단면을 명쾌하게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비를 수행이념으로 한 대승불교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또 그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풍부히 간직하고있다. 그러나 깊은 계곡의 산사에서 결가부좌한 채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비 수행은 많지만 세속에 번득이는 행동 비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불교의 사회참여는 수많은 경전에서 구체적인 항목으로까지 상세히 열거돼 있다. 『우파한계경』『상법결의경』『법화경』『화엄경』『유마경』『무량수경』『유가수지론』등은 대승보살의 사회사상을 화려하게 펼쳐 보인다.
불교사회참여의 진면목은 『모든 사람이 육체적, 사회적 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건설』이라는 이상에 있다.
구체적으로 불교의 대 사회활동은 포교와 사회복지 활동으로 요약된다. 경전이 제시하는 사회복지 활동은 빈궁 구제와 병자시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승불교는 특히 포시·지계 등을 통한 이타의 사회참여를 거듭 강조한다. 빈자보시·병자보시·사회사업 등 수많은 이타행위가 구체적으로 경전을 통해 열거돼 있다.
『보살은 이타를 목적하므로 몸·생명·재산을 아끼지 않으며 이를 자리라 이름한다.』 이타 즉 자리임을 강조한 『우사한계경』은 보살의 사회활동 예시에서 11번째 항목으로 『맹인을 보면 손을 잡고 지팡이를 주어 인도하라』고 했다.
또 『상법결의경』은 상법시기(부처님 열반 후 5백년을 지나 1천년동안 부처형상만 짓고 증득이 없는 시대)의 세상에서는 빈궁하고 고독한 자를 구하는 것이 제일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전래 1천6백년의 역사를 통해 「민족불교」로 까지 자리를 굳혔다는 긍지를 가진 한국불교의 사회 참여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많은 불교학자들은 신라=대중·호국불교, 고려=궁중·어용불교, 조선조=산간·부녀불교라는 도식으로 한국불교의 현실참여 역사를 비판한다.
오늘의 한국불교 역시 현실참여에 관한 한 별다른 획기적인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수억원씩을 들였다는 많은 불사의 이야기는 있어도 물의를 빚는 사회문제에 대한 흔쾌한 방향 제시나 괄목할만한 복지·의료사업 등은 거의 없다. 일부 불교종단과 개사찰들이 최근 고아원·양로원 등을 설립하긴 했지만 아직은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
불교조계종은 20여년 전부터 불교병원, 불교방송국 등의 설립을 거듭 염원해 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구체적 진전이 없다.
장영자 여인사건의 뒷얘기로 불교와의 관련부분이 보도되자 이에 합의하는 전화가 신문사에 걸려왔다.
『당신 ○○○기자요. 나 H스님인데 당신을 고소하겠오』로부터 시작, 온갖 욕설을 퍼붓다 말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장 여인과 불교와의 관계가 터무니없이 과장보도 됐다는 것이 항의와 욕설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우리 국가전반에 미친 영향의 심각성에서 볼 때 불교계는 항의와 욕설에 앞서 불교의 중생제도라는 각도에서 그녀의 비뚤어진 심성을 제도하지 못한 종교적 책임과 장 여인의 사기행각의 위장활동 무대로 말러들었던 도덕적 책임을 오히려 통감해야 했을 것이다.
만공선사의 통쾌했던 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우리 불교의 중생구제를 위한 참다운 현실참여를 기대한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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