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6)<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34)철권 정복수|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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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나라 복싱사의 초기에 가장 대중의 갈채나 칭송을 모으며 일세를 풍미한 북서라면 뭐니뭐니해도 정복수다.
해방을 전후하여 정복수는 복싱의 대명사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복수는 아마추어 생활을 거쳐 40년에 프로로 전향, 복전수랑이란 링네임으로 일본을 무대로 글자그대로 무적의 철권으로 군림, 라이트급과 웰터급(당시로선 최중량급)의 왕자였으며, 가공할 KO펀치로「링의 사자」라고 불렸다.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하는 폭발적인 대시, 태산이라도 와해시킬 듯이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우람한 펀치의 기세, 그리고 전율을 자아내는 살기 띤 눈매 등이 그의 독특한 트레이드 마크였다.
정복수는 2차 대전 말기인 40년대 초·중반 주먹으로 일본을 석권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으며, 해방후엔 국내 프로복싱의 발전에 초석이 된 거목이었다.
복싱계에 데뷔할 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킨 비범한 천재복서가 정복수였다.
37년 제10회 전 조선아마추어 권투 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 불과 16세의 국민학교 선수가 출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립인 신명소학교 6학년인 정복수였다.
물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진학이 늦었을 뿐으로 요즘 같으면 고교1학년정도의 나이였다.
그러나 복싱계 관계자들은 이 최연소 선수에게 당초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모두들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꼬마선수의 기량과 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승장구,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준결승에서 정복수는 YMCA소속의 김인호와 대결했다.
김인호는 이미 중견 선수였으며, 그 전해의 이 대회에서도 준결승까지 진출한 바 있는 강력한 우승후보의 하나였다.
모든 점에서 어른과 아이의 대결이어서 정복수가 이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공이 울리자마자 경기를 주도하는 것은 정복수였다. 맹렬한 대시, 거침없이 휘두르는 좌우 훅과 어퍼커트의 연속 타에 김인호는 시종 뒷걸음질로 도망갈 뿐이었다.
김인호는 1, 2라운드를 간신히 버텨 나갔으나 3라운드마저 무사히 넘기기엔 정복수의 기세가 너무나 거셌다.
정복수의 3회 KO승이었다. 대망의 결승전. 역시 YMCA소속의 한일남과 패권을 건 최후의 한판을 벌였다.
아직까지도 『설마 이번에는…』 하고 16세의 무명의 신진 꼬마에게 전 조선선수권이 넘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한국 복싱사에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경이적인 기록은 기어이 달성되고 말았다.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정복수는 삵쾡이 같이 표독하게 덤벼들어 어리둥절해 하는 한일남을 마구 물어뜯듯 주먹의 난도질을 해댔다.
한일남은 안면 커버링으로 몇 차례의 강타를 모면했으나 연속 보디공격을 맞고 휘청하며 가드가 흐트러지는 순간 눈앞이 번쩍하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 경이적인 속전속결. 체급은 플라이급이지만 펀치력은 라이트급. 사상 최연소 선수권자는 이렇게 하여 탄생됐다.
정복수는 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울극장이 있던 충무로 2가에 집이 있었고 조그마한 장사를 하는 가난한 아버지의 일을 어릴 때부터 도와주며 자랐다.
타고난 체질이 장사인데다 장사꾼들의 세계 속에서 어릴 때부터 정신적으로 단련되어 매사에 무섭게 돌진하는 성품이었다.
소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의 장사가 다소 생계를 안정궤도에 올라선 이후이며, 형 (정복현)이 집안 일을 본격적으로 돌보면서 하나뿐인 동생만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우겨 뒤늦게 신명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신명소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정복수의 타고난 재질을 발견한 한 교사가 평소 알고 지내던 동양권투회의 황을수에게 정복수를 소개, 복싱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전조선 플라이급 아마추어 선수권자가 된 정복수는 일약 장안의 명물이 되었고 두 달 후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 원정 온 동경유학생 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일본대의 강자 이용해에게 판정패, 첫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긴 했으나 이듬해 3년제 보인 전수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밴텀급으르서 국내 최강 김명석에게만 패했을 뿐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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