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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세(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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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영국 고성(古城)들의 건축시대를 한눈에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굴뚝들이 눈에 잘 안 띄면 17세기에 지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윌리엄 3세 등 당시 왕들은 벽난로 숫자대로 재산세를 매겼다. 창문이 드문 고성이라면 대개 18~19세기 초반에 지은 것들이다. 벽난로세 대신 창문 수에 따라 창문세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조차 창문을 없애고 어두컴컴한 생활을 택했다.

이처럼 건축양식은 물론 생활양식까지 바꿔놓는 게 세금이다. 옛 소련에는 '무자세(無子稅)'란 희한한 세금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세였다가 나중에는 인구증가책의 수단이 됐다. 독신 남녀나 자녀 없는 부부에게 소득의 6%를 물렸으니 아이를 낳지 않고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요즘 영국.스위스가 도입을 추진 중인 비만세도 눈여겨볼 대상이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에서 세금을 거둬 사회문제의 하나인 비만 퇴치에 쓰겠다는 것이다. 과연 세금이 허리띠까지 줄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원래 세(稅)는 벼(禾)를 그러모은다(兌)는 뜻이다. 오래전 농경사회 초기부터 도입됐다. 반대급부 없이 정부가 강제로 빼앗는 것인 만큼 공인된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되도록 피해가고 싶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납세의 의무다.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서에 인지세가 뭉텅 매겨진 미국 벤저민 프랭클린의 넋두리다.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세금은 사라지고 소득세.소비세.재산세로 대폭 정비됐다. 세금이야말로 봉건시대와 근대를 가르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들은 세금이 보편적이고 공평하게 매겨져야 하며 재산이나 소득의 종자돈까지 뜯어가서는 안 된다는 등의 독일 경제학자 와그너의 조세 4대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근래 들어 정부가 다시 세금으로 부동산값을 때려잡겠다고 벼르고 있다. 오래 갖고 버티면 보유세로, 팔아넘기는 사람에겐 양도세로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세무 전문 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현실에 맞지 않는 세금은 오래가지 못한다. 약효도 의문스럽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세금 몽둥이를 휘두른 정권치고 뒤끝이 좋은 경우가 드물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