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세계화' 상징으로 재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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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대의 항해가인 정화(鄭和)가 중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600년 만이다. 중국 국무원은 11일을 '정화의 서양(西洋) 대원정 600주년 기념일'로 정했다. 중국 국가박물관은 6일 '대원정 전시회'의 막을 올렸다. 넉 달간 지속된다. 정화 함대가 출항의 닻을 올렸던 장쑤(江蘇)성 타이창(太倉)에선 '정화, 항해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정화 기념 우표도 발행됐다. 난징(南京)의 정화 기념관 참관을 위해선 2주 전에 예약해야 한다. 중국의 7월은 '정화 열기'에 휩싸여 있다.

정화는 영락제(永樂帝)의 지시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수백 척의 선단을 지휘해 일곱 차례나 서양으로 항해를 떠났던 인물이다. 명대의 서양은 말라카 해협의 서쪽을 말한다. 출항 목적은 겉으론 '세상 끝의 국가도 조공을 바치게 하라'는 영락제의 지시에 의해서다. 속으론 영락제가 축출한 건문제(建文帝)의 행방을 쫓기 위해서란 지적이 있다.

정화의 함대는 인도네시아.베트남.태국.캄보디아.스리랑카.인도.중동은 물론 멀리 아프리카까지 닿았다. 영국의 해군 퇴역 장교 개빈 멘지스는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71년 이른 1421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2002년 출판한 '1421년,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라는 저서를 통해서다.

멘지스는 14년간의 조사를 통해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항해 지도가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중국 선박의 잔해가 존재한다는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정화가 처음으로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화는 500년 가까이 중국인의 뇌리에서 잊혔었다. 권력 투쟁이 문제였다. 대항해는 환관인 정화가 주도했다. 그러나 정화를 총애했던 영락제 사후 유학자들은 환관 세력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수백 척의 함선 제조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대항해의 조공 무역으로 인해 국고가 탕진됐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화의 항해 기록 대부분을 불살랐다. 잿더미로 변했던 정화를 20세기 초 다시 역사 속으로 불러낸 인물은 청말의 개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그는 갈가리 찢긴 청나라의 현실을 개탄하며 중국인의 기상을 다시 세울 모델로 정화를 끌어냈다. 1980년대엔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바다로, 세계로 나아갔던 정화를 되살렸다. 그러나 일시적이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를 맞아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정화 열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 조각의 널빤지도 바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던 명과 청의 엄격한 해금(海禁) 정책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말한다. "중국은 근대 86차례의 외침을 받았다. 적은 모두 바다로부터 왔다." 상하이(上海) 해사(海事)대학 해양문화연구소 소장인 스핑(時平)의 설명이다. '쇄국으론 발전이 없다, 중국의 미래는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다'는 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정화는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스핑은 또 정화의 대항해가 전하는 시대 정신으로 "평화.협력.공동 발전"을 꼽는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등은 식민지 개척을 통한 돈벌이에 혈안이 됐던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화는 왕명을 받은 관리로 조공무역이라는 외교 업무를 평화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부상은 평화적이라는 이야기다.

유상철 기자

▶ 출처: 아주주간

'신밧드의 모험'모델이 정화?

'아라비안 나이트(千一夜話)'에 '신밧드의 모험'이 나온다. 신밧드가 바다에 일곱 번 나가 신나는 모험을 펼친 끝에 부자가 돼 바그다드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그 신밧드(Sinbad)의 모델이 중국인이라고 하면 믿어질까. Sinbad는 Sinbao라는 인물이 아랍권에 전해질 때 맨 뒤의 알파벳이 잘못 전달된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Sinbao는 바로 명(明)대의 항해가인 정화(鄭和)의 영문 표기다. 정화의 아명은 '싼바오(三保)'. 그리고 서양에 이 아명이 'Sambo' 또는 'Sinbao'로 알려졌다고 한다.

정화는 1371년 윈난(雲南)성에서 태어났다. 성은 마(馬). 이름은 싼바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이었다. 11세 때 고향인 윈난성의 쿤양(昆陽, 현재의 쿤밍)이 명나라에 정복됐다. 이민족을 거세해 환관으로 만들곤 한 명나라의 당시 정책에 따라 정화는 이후 환관이 돼 베이징(北京)으로 보내졌다. 정화는 1399~1402년의 '정난(靖難)의 변' 때 무공을 세웠다. 당시 황제인 건문제와 지방 세력인 연왕(燕王)의 싸움에서 연왕 편을 들었고 연왕이 승리해 영락제(永樂帝)에 오르자 관운이 틔었다. '정(鄭)'씨 성도 이때 하사받았으며 환관의 장관 격인 태감에 발탁됐다.

정화의 함대는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배'라고도 해 '보선(寶船)'으로 불렸다. 그의 선대 중 큰 것은 길이 150m, 폭이 60m가 넘었다. 2500t급으로 한 척에 1000명 가까이 승선했다. 한번 출항에 보통 보선 60여 척에, 지원 선박 40척 등 100척가량이 동원됐고 승무원은 2만7000명 정도였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가 250t 급에 지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엄청난 규모였다.

정화는 1433년 마지막 항해에서 돌아오다 죽었다는 설과, 귀국 이태 뒤인 1435년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상철 기자

*** 바로잡습니다

7월 11일자 10면 '신밧드의 모험 모델이 정화?' 기사 중 '아라비안 나이트(千日夜話)'의 한자가 잘못 표기됐습니다. 천일야화의 '천일'은 1000일의 '千日'이 아니라 1001일을 뜻하는 '千一'이 맞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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