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라인강의 기적」표류하는 가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게르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웬만큼 친절을 베풀며 절친한 사이라 해도 적당히 간격을 둔다.
초면의 친절이 손해일리가 없고 가까와도 거리를 두어야만 밀착관계로 빚어지는 손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게르만의 생리주의적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가깝고도 먼 관계는 부부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밖에서 본 게르만의 가정은 한결같이 행복한 모습이다.
출근길의 남편들은 문 앞에 서있는 부인에게 몇 차례씩이나 인사를 보내며 부인들도 남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문 밖에 서 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한 남편들은 부인대신 찬거리를 사오며 불평 한마디 없이 저녁밥까지 짓는다. 그런가하면 식사 후 그릇을 씻으며『리브헨(여보)』을 연발한다.
주부도 마찬가지다. 가사는 물론 자동차로 남편을 출·퇴근시키는가 하면 따뜻한 점심을 직장으로 배달해주기도 한다.
바이킹족이 침범했을 때인 10세기께 남편의 생명을 위해선 목숨까지 희생했던 북독의 기질과, 여자들의 말이면 무조건『야』(예)하는 남독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가지 예다.
그러나 이들 가정의 내부세계를 관찰해보면 이런 현상은 희생적인 인간관계보다는 도덕적 의무를 지키는데 불과한 것임을 알 수있다
같이(zusammen)살면서 따로(geyennt) 생각하는 부부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식탁에 앉은 부부가 다른 종류의 저녁을 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TV채널을 놓고서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보겠다며 다투는 일도 흔하다.
휴가지를 놓고 남불이다, 북구다 하며 다투다가는 끝내는 헤어져 남북으로 제각기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성 짙은 게르만의 표류 현상은 독신생활·이혼·무자녀 현상이 더욱 부채질한다.
주간 슈테른지는 최근 특집「독신 생활」(alleir Leben)을 통해 25세 이상 40세까지의 독신자가 무려 4백만명에 이른다면서 이들 독신주의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게르만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독신 붐으로 경제 침체에서도「독신 산업」은 성업하고 있다.
서독의 주택난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독신자 아파트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며 소파와 식탁에서부터 각종 통조림에 이르기까지 1인용 상품이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독신주의자들은 서독의 출산율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남의 가정에 파탄까지 일으킨다.
독신 남성이 가정주부를, 독신여성이 기혼남성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최근 알렌스바호가 실시한 남녀관계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녀 모두 상대방의 섹스어필을 정절보다도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도덕관의 변화와 더불어 독신주의자의 급증은 이혼을 부채질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5만건에 불과했던 이혼 가정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7만건으로 늘어나 각급 학교의 학부모회의 때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대리참석이 적지 않다.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대가족 제도가 특징을 이뤘던 프로이센시대와는 차이가 엄청나다.
아침과 점심을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어린이들이 적지 않다.
나들이는 쇼핑에서부터 저녁 초대에 이르기까지 부부만이 나가며 아이들은 하오8시 이후엔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같은 부모와 자녀간의 거리감은 갖가지 부작용을 남고있다.
자녀들은 부모와의 의논 한마디없이 마음대로 진학을 결정하기 일쑤이며 성년인 만18세가 되는 날 짐을 챙겨 독신자 아파트로 옮기기도 한다.
이같은 가정 파탄이 근면하고 합리적인 게르만의 기질을 점차 퇴색시키고 있는 원인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진단한다.
전후에 꽃을 피운 물질문명이 가정을 병들게 한 것이 선진 공업국가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지만 서독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지 않을는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