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44. 점심 요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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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MBC '웃으면 복이와요' 공개 녹화장에서 연기하고 있는 필자.

1969년 MBC-TV가 개국했을 때만 해도 TV는 아주 귀했다.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지만 정작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도시는 그나마 나았다. 시골에선 한 동네에 한 집 있을까 말까 했다. 그런 곳에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TV가 있는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은 TV를 아예 마루에 내다 놓고 사람들이 마당의 평상에 앉아 TV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참 묘했다. 사람들은 TV가 드물기 때문에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당시 MBC '웃으면 복이와요' 녹화는 공개홀에서 진행됐다. 녹화 시간은 매주 금요일 오후였다. 그런데도 공개홀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그들은 대부분 집에 TV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집에선 볼 수 없는 인기 코미디언을 공개홀에서 보려고 온 것이다. 소문만 듣다가 얼굴을 직접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웃으면 복이와요' 녹화장은 극장 무대와 비슷했다. 공개 녹화라 거의 NG 없이 진행됐다. 물론 출연진이 여러 번 리허설을 한 덕분이었다. 배우들은 아침에 방송국으로 갔다. 오전에 리허설이 있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녹화를 시작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년 퇴직한 교장 선생님부터 아기를 업고 양산을 든 부인, 이런저런 관공서의 기관장,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사람 등이었다. 하나같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요청했다. 그때만 해도 극장의 배우들을 대접하던 문화가 남아 있었다. 유랑극단 시절에도 사람들은 주연 배우와 함께 밥 먹는 걸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나를 찾아오는 팬들도 그런 '따뜻한 자리'를 기대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자리에 흔쾌히 응했다.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온 팬들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허설과 녹화는 팀 플레이였다. 함께 밥 먹고, 함께 움직일수록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래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를 빼곤 출연진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제발 와서 밥을 먹으라"고 가장 강력하게 요청했던 건 MBC 주변 식당들이었다. 대접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와서 밥을 먹으면 손님이 덩달아 넘치기 때문이었다. "점심 때 저 집에 가면 배삼룡을 볼 수 있어"란 소문만 나도 사람들은 줄을 서서 밥을 먹었다. 물론 식당에선 우리에게 최고 서비스를 제공했다. 대신 우리가 식당을 옮기면 아무리 잘 되던 식당도 파리를 날렸다.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제발 한 번 와 달라"고 사정하던 식당도 있었다. 나는 끝내 그 식당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애절하게 부탁했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인데 그땐 왜 못했을까. 그 식당 주인에 대한 미안함이 언제부턴가 내 가슴 한 구석에 계속 남아 있다. 하긴 지난 삶에서 아쉬운 게 그것뿐이었을까.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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