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달갑지 않게 된 ‘엄마하고’의 추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9호 30면

‘엄마하고 나하고’.

동요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참 정겨운 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하고 무얼 했을까. 날씨가 좋은 날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냇가로 나갔다. 시냇가에서 엄마는 빨래를 하고 나는 옆에서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다. 봄이 되면 나물을 캐러 들판으로 나갔고, 비 오는 날이면 버섯을 따러 야산을 헤맸다. 마당에다 채송화 씨를 심었고 봉숭아 꽃잎으로 손톱을 물들였다.

겨울이면 버스를 타고 멀리 읍내에 있는 목욕탕에 가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그 연례행사에서 엄마는 나를 뜨거운 탕 속에 푹 집어넣었다 꺼낸 다음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몸을 빡빡 문지르며 묵은 때를 벗겨내곤 했다.

‘엄마하고 나하고’.

이 말을 들으면 나는 대충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엄마하고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엄마하고 같이 미술학원에 가고, 보습학원에 가고, 영어학원에 가고, 피아노 학원에 가고,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고, 서점에 가고, 피자나 햄버거를 먹으러 패스트푸드점에 가고…. 대충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아! 또 있다. 요즘 아이들은 엄마하고 같이 미술전시회에도 가고, 엄마하고 같이 음악회에도 간다. 학교에서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전시회나 공연 관람을 과제로 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공연장에서는 학교 성적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할 각오가 돼 있는 엄마들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끌려온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음악회에 끌려온 아이들은 어린아이의 인내심을 실험하는 그 긴 시간 동안 객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면 아이는 계속 몸을 뒤틀고, 옆 친구와 소곤거리고, 그도 아니면 아예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잠을 잔다.

예전에 한 독창회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연주 곡목은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였다. 내 자리 바로 앞에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앞에서 넷째 줄인가 다섯째 줄인가 여하튼 무대 위에 있는 연주자의 눈에 관객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음악이 진행되는 동안 앞줄에 앉은 아이들은 연신 몸을 움직이고, 고개를 돌려 서로 소곤대고, 휴대전화를 꺼내 이리저리 만졌다.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이 아이들을 탓할 생각이 없다. 아이들이 음악회를 지루해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는 한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리고 마지막에 남편의 죽음을 맞아 슬픔에 잠기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것이 정서적으로 아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음악회가 끝나고 나오니까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연주회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씁쓸했다.

학교 숙제 때문에 엄마와 아이가 연주회장 안팎에서 견뎌야 했던 그 시간에 차라리 “엄마하고 나하고”라는 말로 시작하는 멋진 추억거리를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