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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삶이라는 재료의 본래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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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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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10년 전 독일 출장을 갔습니다. 자동차를 달려 숲 속의 옛 건물로 갔습니다. 동행한 교수는 “여기가 독일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체인 BMW와 메르세데스벤츠, IBM 등에서 세미나를 하러 오는 곳이다. 정말 고급스러운 곳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멋진 곳이길래 그렇게 쟁쟁한 기업들이 오는 걸까?’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죠. 방문을 열고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숙소에는 TV도 없고, 전화도 없었습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았습니다. 방 안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무로 된 깔끔한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아주 작은 전등 하나가 달랑거렸을 뿐입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왜 여기가 ‘가장 고급스러운 곳’일까. 무엇 때문에 이곳을 특별하다고 하는 걸까.

 이튿날이었습니다. 찬찬히 지난밤을 되짚어 봤습니다. ‘단조로운 방에서 내가 만난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소박함’이었습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방, TV도 없고, 전화도 없는 방. 처음에는 ‘심심하고 무료한 방’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자 저도 모르게 ‘생각하는 방, 명상하는 방’으로 바뀌더군요. 그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정말 소박한 것과 정말 고급스러운 것. 둘은 그렇게 통했습니다. 저는 마치 고급스러움의 ‘새로운 버전’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풍경2: 서울 은평구 삼각산에는 단아한 비구니 사찰 진관사가 있습니다. 주지 계호 스님은 ‘사찰 음식의 달인’입니다. 정갈한 반찬들은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깊고 그윽한 맛을 냅니다. 스님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양념을 적게 쓴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었더니 “그래야 재료에 담긴 본래 맛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음식에도 ‘소박함의 코드’가 있더군요.

 그저께 프랑스 테제공동체에서 온 한국인 수사를 만났습니다. 신한열 수사도 ‘소박한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소박하다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거다. 소박함을 통해 우리는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의 신비”라고 답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들은 다 공짜로 주어진다고, 우리가 햇살을 돈 주고 사지는 않는다고. “땅이나 건물이 있어야만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한강변의 억새를 봐라. 그냥 주어진다. 그걸 누리는 사람도 있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쫓기며 각박하게 살 때는 안 보인다. 우리가 소박해질 때 비로소 그게 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숙소, 소박한 음식, 소박한 삶. 셋이 서로 통하더군요. 음식에는 식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양념과 너무 강한 조리법은 종종 그걸 덮어버립니다. 또 없애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삶이라는 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이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거기에 너무 많은 양념을 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학, 저 직장, 이만큼의 재산, 저만큼의 성공. 그 다음에는 자식의 대학, 자식의 직장, 자식의 재산, 자식의 성공. 온갖 양념을 좇다가 정작 삶이 가진 ‘본래의 맛’을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도화지 위에 1000개의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점만 들어옵니다. 여백은 좀체 보이질 않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 개의 점이 있습니다. 점 못지않게 여백도 크게 보입니다. 삶이라는 도화지에 꼭 필요한 점들을 찍기. 삶의 여백을 누리는 노하우가 아닐까요.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이 제 기능을 한다.” 때로는 소박함이 고급스러움보다 더 고급스러운 이유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