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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초대내각(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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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무위원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조봉암 농림은 국회의 도움으로 구속위협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내각을 떠나야했다. 구속동의 요청이 부결된 이틀 뒤인 2월23일 대통령은 조봉암 농림을 권고 사직케 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감찰위원회가 문제삼은 자금유용과는 관계가 없었다.
조농림 파동이 있은 두달 뒤 내각은 또 하나의 파동에 부딪쳤다. 그해 3월31일 감찰위원회는 임영신 상공장관의 비행을 문제삼아 면직건의를 결의한 것이다.
지적된 비위 사실은 임 장관이 안동지구 보궐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상공부 관리 귀속업체(귀속업체란 일본인 소유였던 업체를 말함)인 대구메리야스공장에서 2백만원을 빌어 쓰고 제품을 뇌물로 받아 선거운동에 사용했고 △역시 귀속업체인 대구방직공사의 자동차를 선거에 이용했으며 △중국인 무역상 아남상두에서 1백만원을 빌어 쓰고 그 댓가로 양복지 등의 수입허가를 해주었다 △대통령의 75회 탄신일 축하기념 식수자금을 모으기로 결정, 산하업체에 할당했다가 대통령의 책망을 듣고 중지했다는 등 10개항.

<울며 결백주장>
이 사건이 나자 임 장관은 대통령에게 달려가 울면서 결백을 주장하고 안동보궐선거의 여파로서 행해진 모략이라고 하소연했다. 대통령도 몇 사람을 물어 사건내용을 알아본 뒤 별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침 신익희 국회의장이 대통령을 방문해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대통령은 임 장관 사건은 문제 삼을 일이 못되는 것으로 들었다면서 국회에서 떠들썩하게 다루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국회도 반민법 파동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신의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감찰위원회 보고서만 접수하고 논의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찰위원회의, 면직결의가 보도되고 임상공이 이에 맞섬으로써 사건은 표면화되었다. 임 상공은 국회에 해명서를 올리는 한편 라디오를 통해 <내게 비위사실을 들씌운 것은 악의적인 모략> 이라고 해명하면서 <감찰위원회는 공산당의 소굴>이라고까지 몰아쳤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국회도 조사에 나섰다.
약1개월만에 국회는 조사를 종결했다. 그런데 조사보고서는 임 장관에 대한 감찰위원회의 면직건의가 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보고서는 결론으로 감찰위원회가 밝힌 임장관의 비위사실은 행정상의 문제는 될 수 있을지라도 면직결의의 사유는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붙였다. 이 보고서를 놓고 위일환의원 등 일부는 임장관이 산하관리 업체에서 돈을 빌어 쓰는 등의 일은 과오며 그 동안의 상공행정도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 보고서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다수의원들은 건국 초에 국무위원의 조그만 행정상의 불찰을 문제삼아 그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임장관을 두둔해 보면서 접수로 국회로서는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내각 안에서 일어났다. 검찰은 감찰위원회의 고발을 기초로 조사에 착수, 임장관에게 소환장을 발부했고 임장관은 처음 얼맛동안 이에 불응해 검찰과 대립했다.
결국 검찰이 임장관을 형사 입건해 기소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이대통령은 이인 법무장관을 불렀다. <임 장관 사건은 부정이라고 할 것이 못된다. 정부위신만 손상되니 기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법무는 이 말을 듣지 않고 5월28일 기소를 해버렸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임 장관도 국무회의에서 사표를 냈다. 장관의 사표처리는 국무회의 논의사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무회의는 이례적으로 임 장관 문제를 화제에 올려 논의하고 정부의 체면을 위해 임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해 대통령에게 이 뜻을 전달했다.

<이 대통령 격노>
대통령은 임영신 사건이 계속 떠들썩하게 파문이 커지자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대통령은 감찰위원회는 대통령의 직속기구가 아닌가. 장관의 비위사실을 적발했다해도 대통령 직속기구라는 성격에 비추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지 신문에 발표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
즉시 감찰위원회의 규칙에 관한 규정을 고쳐 조사된 사실은 검찰이나 법원에 의해 부정이 밝혀질 때까지는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임장관의 사표문제에 대해서도법원에 기소했다니 재판결과를 기다려 처리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6월6일 대통령은 임장관의 사표를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이인 법무·유진오 법제처장·김동성 공보처장도 물러나게 됐다. 임영신 사건의 커다란 파문이었다. 그러나 이인 법무의 후임은 임 장관의 기소를 강력히 주장했던 권승렬 검찰총장을 승진, 기용해 검찰의 기소에 대한 문책인사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이 사건에 대한 관계자들의 뒷날 회고.
△임영신씨-안동선거 후 내가 업자들로부터 돈을 얻어 썼다는 모략이 많았다. 그럴 때인데 이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국회에서 말썽이 되기 전에 루이즈 임이 좀 쉬어야겠어. 그리고 자신이 국회의원이니 국회에서 스스로 해결해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곧바로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이 사건은 나를 매장시키려는 모략인 이상 사실을 규명할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럼 빠른 시일 안에 사실을 밝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랬지만 자꾸 확대되자 더 이상 말썽이 없게 하기 위해 사표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인씨-임 장관을 기소하고 나니 도저히 정부에서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을 찾아가 사표를 받아달라고 간청했는데 결국 뒤 늦게야 수리해 주었다.
아뭏든 조 농림, 임 상공 두 장관의 감찰위원회 징계파동은 그 무렵 정계의 정치적 갈등이 빚은 불행한 사건이다.
대통령 비서였던 고재봉씨는 『조 장관이나 임 장관에게 말썽의 소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부정이랄 것도 없는 일을 사건으로 확대시킨 것은 정치적 배후가 있었다. 임 장관의 경우는 다른3명의 국무위원이 임 장관을 몰아내는데 앞장섰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고 했다.

<이 법무도 물러나>
확실히 두 장관 파동의 언저리엔 각료들의 반목이 엿보였다. 조농림의 경우 농정에서 다른 장관들의 질시를 샀다.
초기 국무회의에서 조장관은 <장관이란 호칭은 왕조의 신하로 백성 앞에 군림하는 인상을 준다. 부장으로 고쳐 부르기로 하자>고 했다. 이에 대해 장택상 외무는 <부장이라니 장관이 무슨 순사부장(일제하경찰직급)이란 말이냐>고 반대해 한참이나 논쟁했다.
그는 보수파장관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의 농정국장 강신국씨의 증언.
『조 농림은 한민당에 의해 희생되었다. 당시 조 농림의 토지개혁·농업협동조합 구상, 그리고 농민신문을 통한 농촌계몽활동 등은 지주계급이 주류를 이룬 한민당에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감찰위원회에서도 농민신문에 관한 농림부의 보조금 지급을 문제삼았지만 이는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대통령은 공산당을 이기는 길은 농촌을 부상케 하고 농민을 계몽하는 일이라고 해 주간지농림신문을 만들게 했다.
사실 농촌정책은 조 농림의 정책이기보다 대통령의 정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민당은 이를 반대했고 김준연씨 등이 농림장관을 미워했다. 한민당계인 정인보 감찰위원장은 한민당의 요구에 따라 의도적으로 조 농림 부정사건을 확대했다.』
임 장관의 경우도 안동보궐선거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정현모 의원이 도지사로 전출, 의원직을 내놓게 돼 질시된 이곳 보궐선거에는 장택상 외무도 입후보해 두 장관의 경쟁이 되었다.
선거 후엔 현지 경찰이 임 장관을 돕고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해서 말썽이었다. 거기에다 임 장관은 상공을 맡게된 과정이 이범석 총리의 도움을 받아 내정자였던 한민당계인 허정씨를 밀어낸 데다 상공행정에서 한민계 업체와 마찰이 잦았다.
이 총리도 한민당의 경계를 받았다.,
여순사건이 나자 국회에서 한민당계 의원들은 총리의 국방겸직을 떼어 국방장관을 따로 임명하라고 공식으로 제안 건의한 사실은 이 증언을 뒷받침한다. 제헌의원을 지낸 김인식씨(대동청년단출신)도 같은 설명을 했다. 그 증언.

<한민당서 입김>
『임 상공, 조 농림도 그랬지만 초기의 정치적 파동은 한민당이 그 배후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어. 제헌국회는 한민당과 소장파의원간의 대결장이었지. 한민당은 이박사의 측근인 윤치영 임영신 이 총리 조 농림 등 네 장관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어. 내각 안에선 이인 전진영씨 등이 친 한민당계였고 감찰위원회와 경찰이 한민당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어. 내한과 국회 안의 반대세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는 일에서 김준연씨의 활약이 대단했지]
대통령은 장관들이 합심해 일하지 않고 파벌을 만들어 다투고 일에는 서투르다해서 크게 실망했다. 확실히 초대내각에서 파벌과 정실인사는 문제 거리였다. 그런 잘못된 인사행정의 표본적 사례를 박병배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국초창기라 그러했겠지만 일반인사는 엉망이었다. 나는 윤치영 내무장관의 부탁을 받고 경찰 옷을 그냥 입은 채 그의 비서실에서 일을 할 때입니다. 족청 충북단장을 하던 이모씨과 전북의 송모씨는 경찰서장자리를 얻기 위해 운동을 했지요. 부탁을 받은 이 총리는 윤 내무에게 이와 송을 경찰장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해왔읍니다. 경찰장은 영어의 chief of police를 그대로 번역해 쓴 것으로 도경국장이나 치안국과장의 직위에 보임할 수 있는 관급인데 이 총리가 서장과 혼동한 것입니다.
총리의 청을 거부하기 어려운 윤내무는 그들 출신도의 경찰국장을 각각 시켰읍니다. 서장운동을 하던 본인들도 졸지에 도경국장이 되고 보니 깜짝놀랐지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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