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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이슈] 60년대 신발·가발과 닮은꼴… 이젠 첨단 아닌 단순 조립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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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PC 업체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국내 컴퓨터 산업이 위기에 몰렸다. 세계 컴퓨터 시장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1990년대까지 최첨단 정보기술(IT) 산업의 주역이었던 PC 산업이 2000년 이후 단순 제조업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PC 종가'인 미국 IBM이 PC 사업 부문을 중국 업체에 넘기고, 국내 대표적 'PC 명가'인 삼보컴퓨터가 부도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삼성전자.LG전자 등 대기업도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길 정도다.

한때 블루오션(부가가치가 높은 새로운 시장) 산업의 대표 주자였던 PC 산업이 불과 10여 년 만에 레드오션(치열한 경쟁시장) 산업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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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은 어떤가=요즘 PC 값은 데스크톱PC(모니터 제외)가 50만원, 노트북PC가 100만원 아래다. 지난해 초만 해도 데스크톱은 100만원대, 노트북PC는 200만원대였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 세계적으로 '가격 파괴'바람이 불면서 컴퓨터 업체들의 값 내리기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동안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꼽혔던 노트북PC도 지난해 말 델과 삼보컴퓨터가 앞다퉈 100만원 벽을 깨고 99만원짜리 제품을 내놓으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 델은 최근 79만원대 노트북PC도 선보였다.

이에 따라 삼성.LG 등 대기업 브랜드도 값을 낮춰야 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 등의 조립업체들은 데스크톱PC를 25만원짜리까지 내놓고 있을 정도다. 이 같은 PC 값 추락을 전문가들은 세계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LG전자 관계자는 "중국산 PC가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가격경쟁이 촉발됐다"고 말했다. 여기다 PC 교체 주기가 1~2년으로 짧아지면서 가격이 싼 제품을 찾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PC 업체들이 값싼 중국산 부품을 쓰면서 가격 하락은 가속화했다.

◆ 왜 이렇게 됐나=IBM이 중국 레노버에 넘어갔고, 삼보컴퓨터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는 PC 산업이 더 이상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내 공장에서 만든 제품은 중국 공장의 생산단가와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이렇게 되자 세계 PC 시장도 마케팅 능력이 뛰어난 다국적 선두 기업과 값싼 노동력으로 저가 PC를 생산하는 중국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델컴퓨터 등 상위 5대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47%로 10년 전(31%)보다 높아졌다. 또 생산지를 기준으로 하면 중국이 전 세계 PC의 90%를 차지하게 됐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수석연구원은 "PC는 특별한 기술력이 필요한 제품이 아니고, 대규모 생산 체제와 유통망을 갖춘 업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즉 규모의 경제를 갖춘 업체가 부품을 싸게 조달해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게 이 시장의 생존요건이라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은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지난해 삼성.LG.삼보.주연 등 국내 4개사가 생산한 PC는 다 합쳐야 180만 대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1%에 불과했다.

◆ 어떻게 해야 하나=사실 PC 자체는 조립산업의 성격이 강하다. 90년대 한국 IT 산업의 발전을 상징하는 '향수 어린' 업종이지만, 현 시점에서 부가가치를 높일 여지가 거의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60~70년대 전형적 노동집약산업인 신발.가발 업종이 한국 산업화에 공헌한 뒤 주역에서 물러난 운명을 현재 PC가 밟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잘나가던 산업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상은 반도체.액정화면(LCD).휴대전화 등 현재의 수종사업에서도 앞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전문가들은 PC 산업은 의외로 북한에 강점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IT에 대한 관심이 높은 데다 북한 근로자의 손재주도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핵이나 미국의 전략물자 통제 문제 등만 풀리면 북한이 중국 못지않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위기에 처한 PC 산업에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통부 관계자는 "세계적인 고가 브랜드 창출과 디지털 기기와 연계된 서비스, 차세대 고성능 PC 개발 등은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강점이자 해결책"이라고 설명했다.

이원호.이희성.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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