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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인환 의사와 「스티븐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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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중 하나인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명물이 많다. 금문교, 차이나타운, 언덕용 오르내리는 전차 등…. 이들 명물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페리빌딩.
이 페리빌딩과 한국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l908년3월23일 우연히 발생한 한 총격사건으로 비롯된다. 한국인 장인환과 전명운, 그리고 미국인 외교관 「더햄·화이트·스티븐즌」 이렇게 3인이 이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날 아침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페어몬트호텔을 나선 「스티븐즈」는 샌프란시스코주재일본총영사 「고어께」(소지)와 함께 동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고 건너편 오클랜드로 가는 페리보트가 떠나는 페리빌딩에 도착했다.
「스티븐즈」일행이 페리빌딩 앞에 도착, 막 승용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였다. 빌딩 옆 한쪽구석에 숨어 있던 한 동양인이 「스티븐즈」를 향해 손수건에 감춰진 피스톨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결과는 불발. 당황한 그는 앞으로 달려가 「스티븐즈」를 권총으로 내려치기 시작, 두 사람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때 이들을 향해 세 발의 총탄이 발사됐다. 한발은 격투중인 동양인의 가슴을 관통, 다른 두발은 「스티븐즈」의 어깨와 다리에 박혔다. 총을 쏜 사람은 한국인 장인환. 격투로 부상을 입은 동양인은 한국인 전명운이었다.
그러면 문제의 인물 「스티븐즈」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20대 초반인 1885년 도오꾜 주재 미국영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생활을 시작, 주일영사관시절부터 『일본에 극히 우호적 인물』로 평가되던 사람. 일본인들은 그를 가리켜 『동양에 나와있는 미국인 중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불렀고. 그후 아예 일본의 무정에 들어가 워싱턴주재 일본영사관 고문을 지낸 친일인사였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04년8월 노일전쟁이 한참이던 때.
전쟁초기 일본군은 계속 승승장구, 육·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일본은 한국이 과거 러시아와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토록 하고 『한국의 내정을 개선한다』는 구실로 외국인용병협정(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다.
이 협정은 『한국정부가 재정 및 외교고문을 용빙하고 관계정사를 이들과 합의한다』 는 것이 내용으로 재정에 일인「매까다」(목하전), 외교에 미국인「스티븐즈」가 각각 임명됐다. 이것이 소위 현문정치의 시작이었다.
l908년 3월20일 일본환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스티븐즈」의 행각은 처음부터 재미한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의 방미는 표면상으로 휴가가 목적이었으나, 내면으로는 당시 미국 내(특히 가주지역)에서 일과 있는 일인노동자 배척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교섭과 재미한인단체의 동태파악이 주목적.
도착 후 기자들과 만난 그는 한국의 실정에 대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한 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다 ▲일본이 한국을 다스림은 마치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림과 같다 ▲일부 불만세력이 일본을 반대하고 있으나 일반 백성들은 예전처럼 정부로부터 학대를 받지 않으니 일본은 한국국민에 환영받고 있다.
회견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한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양대 한인단체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이들은 성격상 진보와 보수로 서로 대립했으나, 이 사건만은 민족차원에서 공동 대처했다.
3월22일 양 단체 대표들은 공립관에서 합동회의를 열고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우선 대표를 뽑아 「스티븐즈」를 만나 그의 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숙소인 페어몬트호텔 로비에서 만난 「스티븐즈」는 발언을 취소하기는커녕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과「이또」같은 훌륭한 통감이 있으니, 이는 한국의 큰 행복이며, 동양의 대행』이라고 주장했다.
본부로 돌아온 대표들은 「스티븐즈」의 태도를 바꾸기 어려우니, 그를 제거,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떨칠 것을 결의하고, 거사책임을 공립협회회원인 전명운에게 맡겼다.
전명운을 거사책임자로 결정했을 때 회의장 뒷자리에서 회의진행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인환. 1877년 평북 선천출생으로 일찌기 서북지방 의병운동에 참가, 1904년 미국에와 역부·어장노무자로 생활하면서 대동보국회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만약 전이 실패한다면…』하고 생각, 거사현장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현지 한인들은 크게 흥분, 이를 전·장 애국청년의 장거로 받아들였다.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는 호외를 발행, 동포들에게 널리 알렸다.
당사자인 두 사람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들은 사건의 동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호한다더니 결국엔 나라를 집어삼켰고, 「스티븐즈」는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서 연을 먹으면서 일본을 위해 일하니, 그는 왜놈과 다를 게 없으며 한국의 적』이라고 떳떳이 거사이유를 밝혔다.
「스티븐즈」는 피격 이틀 뒤인 3월25일 상오 숨을 거뒀고, 전명운은 다행히 기운을 회복했다.
암살사건에 대한 일본의 공식태도는 『참으로 애석한 것』이었다.
체포된 두 사람에 대한 공판은 사건발생 4일 뒤인 3월27일부터 시작, 무려 2백80여일 동안을 끌었다.
한인단체들은 후원회를 조직, 변호사를 선임하고 두 사람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전미주 각지의 동포로부터 총 7천4백달러의 성금이 도착했으며, 사건통역으로 신흥우가 나섰다.
당시 변호사로 선임된 미국인 변호사는 「커클린」 「파월」 「베게트」 등 3인. 이들은 피고인들이 1급 살인범으로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일본측변호사에 대해, 『그들의 범행은 오늘의 한국사태와 연관시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재판이 시작된 후 전명운은 증거부족으로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장인환은 10개월 후인 이듬해 1월 제2급 살인범으로 25년형을 선고받고 샌프란시스코 샌퀸틴주립형무소에 수감됐다.
「스티븐즈」 암살사건은 비만 미주 한인뿐 아니라 본국 및 기타 해외한인들에 큰 충격을 줬다. 그후 안중근에 의한 만주 하르빈에서의 「이또」암살사건, 그리고 해외한인단체통합 등 애국의 열기가 한인들 사이에 크게 일어났다.
전명운은 보석 후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단에 가입, 활동했으며 그후 다시 도미, 활동하다가1936년 세상을 떠났다.
장인환은 감옥생활 11년만인 1919년 가출옥, 24년에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고, 27년4월 만 25년만에 고국의 품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꼭 32년이 지난 1962년 정부는 전·장 두 의사에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무연고인 장의사의 유해는 지난 75년 광복30주년 기념 때 LA교민회장이 봉송, 서울동작동국립묘지 애국선열 묘역인 충렬대에 제144호로 이장됐다.
전명운 의사는 부인 주씨와 사이에 따님 하나를 두었는데, 전의사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에 그대로 묻혀있고 따님 전코레스수녀가 이를 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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