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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편집국장이라면…|김철수(서울대법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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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가 만약에 서구나 미국신문의 편집국장이라면, 하고싶은 말도 많을 것이요, 포부도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신문의 편집국장이라면 어떻게 하여 빨리 그 직책을 명예롭게 퇴진할 것인가부터 먼저 생각하게 될 것만 같다.
한국신문의 편집국장이란 책임은 무거우나 권한은 많이 제약되어 있어 자기 이상대로 신문편집을 다 할 수 없기에 말이다.
언론기본법을 보면 편집인은 범죄를 구성하는 내용을 배제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정당한 사유 없이 범죄를 구성하는 내용의 공표를 배제하지 아니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상업주의에 젖어있는 신문의 편집인은 명예훼손, 사생활의 비밀침해, 신용침해 등 범죄를 구성하는 내용을 매일처럼 보도하고 있어 처벌당할 위험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진 신문·주간지·월간지 등의 편집인들이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손해배상청구나 정정 보도 청구사건 때문에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 출두해야 할 일도 골치 아픈 일일 것만 같다.
내가 편집국장이라면 우선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헌법과 법률에 위반될 우려가 있는 인권침해보도는 삼가겠다. 헌법은 명백히 피고인의 무죄 추정권을 규정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사생활의 비밀을 규정하고 있건만 각 신문의 경쟁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일처럼 피의 사실이 공표 되고 있고 명예훼손, 사생활 비밀의 침해가 행해지고 있다. 피의자를 진범이라고 단정하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듯한 보도는 신문의 품격을 위해서라도 추방하여야 하겠다.
요사이 신문은 『강한 자에게는 기고, 약한 자에게는 군림한다』 라는 말을 듣고 있다. 사회적 강자가 광고를 지배하고 있고 신문경영에 역력을 넣을 수 있는 현실에서 강자에게 약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문이란 시민의 권익을 위하여 억강부약하는 사회공기로서의 기능을 다해야한다. 신문구독자의 이해에 민감하게 영합하거나 사회적 강자의 홍보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시민의 권익옹호를 위한 캠페인을 벌여야할 것이다. 소비자보호, 법률구조사업, 서민인권옹호 등을 위한 계도 등도 활발히 벌이면 어떻겠는가? 근로자와 농민 등의 지위향상을 위한 정론도 펴야한다. 국민경제의 균등한 향상이 헌법이 지향하는 사회정의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문이 전국민의 여론을 대변하도록 불편부당의 자세를 지키는데 힘써야 한다. 여론형성에 있어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최대한으로 반영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건설적 비판정신을 함양하고 사설난관 함께 독자의 주장란을 두어 신문사의 주장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장도 최대한으로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 해설기사와 오락기사, 계도기사들은 월간지나 주간지에 맡기고 사실의 정확한 보도를 위주로 하고 정부와 사회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기능을 보다 강화해 봄직하다.
신문이란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독자에게 알릴 의무가 있음을 자각하여 숨김없고 가식 없이 알릴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본다. 또 편집자 의 취사선택에 의하여 사실을 보도하게 됨으로써 독자들은 편집자의 알리고자하는 것 이상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편집자의 자율적 검열이나 편견에 의하여 국민을 오도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론은 공익사항에 관하여 취재·보도·논평·기타의 방법으로 민주적 여론형성에 기여함으로써 그 공적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 정도다.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애사심이나 애국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국제감각과 역사의식을 가진 공민을 만드는 계도적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겠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와 공공단체에 대하여는 정보청구권을 발동하여 공익사항에 대한 정보를 청구할 수 있다. 이것이 거부되는 경우에는 정보청구권에 근거한 소송도 제기해 볼 수 있잖겠는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취재·논평을 위하여 대 기자제도를 두어 이들 대 기자들의 경험과 양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기자들의 조로 현상을 예방하고 이들이 무관의 제왕으로서 정년 퇴직할 수 있도록 권익옹호에도 힘을 써야 한다.
편집권의 독립, 편집인협회의 기능강화 등도 연구해 볼일이다.
발행인과 협의하여 조·석간 제와 일요판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선진국처럼 조간은 정론지로서 기능하도록 하고, 석간은 오락·해설·건강·가정·여성난 등을 보강해도 된다. 조간에서는 신문답지 않은 연재소설 등을 추방하고 석간에나 싣도록 하면 반응이 어떨까?
주간지를 없애는 대신 일요판을 만들어 주간 잡지 형식을 채택하는 것도 내가 편집자라면 고려해 보겠다.
편집국장의 독선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내·외에 모니터와 옴브즈만을 두어 신문의 품격을 유지하고 공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오늘의 신문의 역할은 너무나 막중하기에 한 사람의 편집국장에 의하여 편집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자문기관이라든가 통제기관, 주민참여기관을 구성해 봄직하다.
만약에 이러한 구상들이 실천에 옮겨진다면 발행 부수는 줄어들 것이요, 광고량도 줄어들 것이요, 사면초가 속에 편집국장의 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요, 현세에서는 세상모르는 <「돈·키호테」 편집국장>으로서 입구에 회자될 것이다.
후인들은 아마 이를 명예로운 퇴진이라고 평가해 주게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악조건 속에서도 훌륭한 신문제작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현직 편집국장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현실감각에 둔한 망언을 용서해 주기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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