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미친 전세 vs 고마운 전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김광기
김광기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김광기
이코노미스트·포브스 본부장

“전세가 미쳤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파트의 전세가율(집값 대비 전셋값 비율)이 전국 평균 70%를 넘어섰다. 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다. 단번에 전세금을 수천만원 올려줘야 하는 서민들은 속이 타들어 간다.

 정부가 허를 찔린 듯 당황하고 있다. 집값 좀 올라가라고 주택대출 규제를 풀고 초저금리의 멍석도 깔지 않았던가. 전세 살던 여유 계층이 집을 사기 시작하면 전셋값은 저절로 안정될 것으로 봤다. 그런데 웬걸. 집값은 여전히 게걸음인데, 전셋값만 뛰고 있다. 주택 거래가 늘어난 게 성과이긴 하다. 그러나 재건축 단지 등 인기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전세가율이 60%대 중반을 넘으면 집값이 밀려 올라갔지만, 이번엔 분명 다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은행은 3%대 초반의 싼 금리로 주택구입 자금을 넉넉히 대주고 있지 않은가. 서울의 아파트 전세는 이제 4억~6억원이 주류가 됐다. 여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선 대출을 약간 더 얹으면 집을 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1억~2억원 전세에서 빠듯하게 사는 분들껜 죄송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집값이 올라가긴 힘들 것 같다는 판단에서일 게다. 집을 소유하게 될 때 취득·등록세와 재산세, 감가상각과 물가상승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연 평균 5%는 가격이 올라줘야 본전이라는 게 정설이다. 현실은 어떤가. 경제가 장기 침체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가계의 실질 소득은 겨우 현상유지 내지 감소추세다. 더구나 머지않아 한국도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가 된다. 길게 봤을 때 한국의 집값은 상승 기대감보다는 하락 위험이 여전히 커 보이는 상황이다.

 전세의 최대 장점은 원금 보장의 매력이다. 세입자들은 현재 전세가율에서 볼 때 집값이 30% 이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 더구나 정부는 전세 세입자들을 위한 임대차보호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5억~10억원대 전세에 사는 사람도 한국에선 세입자라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 대접을 받는다. 저금리의 각종 전세대출 제도 덕분에 자금조달 비용도 크게 줄었다.

 또 하나, 전세금은 상속·증여세 회피 수단으로 공공연히 활용된다. 전세는 등기를 안 해도 되기 때문에 국세청 감시망을 피할 수 있다. 요즘 서울 강남 등의 부유층에선 결혼하는 자녀에게 전세 한 채 얻어주는 게 유행처럼 됐지만, 세금 낸다는 소리는 없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세는 이래저래 고마운 제도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돈 있는 여유 계층에 활용도가 높아졌다. 원래 전세시장의 주인이었던 서민들은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해 반월세나 월세로 계속 밀려나고 있다.

 그러면 전셋값은 어디까지 올라갈까. 위의 근거들에 비춰 보면 집값과 거의 맞붙어도 이상할 게 없다. 집값 하락의 위험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인지가 관건인데, 집값의 80~90%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때가 되면 집을 사겠다는 수요가 늘어 주택 거래가 정상화되고, 서민들은 대부분 월세로 옮겨갈 것이다. 전세시장의 소멸 시나리오다. 지금은 그에 앞서 마지막 불꽃을 점점 더 화려하게 피우는 시점인 셈이다.

 현재 전국의 전세 보증금은 45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350조원)보다 100조원이나 많다. 전세 보증금은 집 주인이 세입자에게 지는 사금융 가계부채다. 전세시장의 소멸은 사금융이 은행 등 제도권 대출로 전환하면서 통계상 가계부채가 더욱 팽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부가 전세시장 안정을 위해 다시 전면에 나설 모양이다. 전세 계약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부질없는 일이다. 전셋값 상승만 재촉할 공산이 크다. 전세시장의 주류는 이미 중산층 이상이 됐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월세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저소득층에 집중해야 한다. 사회안전망 차원에서도 국가 재정을 투입해 싼 월세의 공공 임대주택을 대량 공급할 때가 됐다. 열심히 살다 실패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일은 막아줘야 한다. 일반 주택 공급과 전세는 시장 원리에 과감히 맡겨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광기 이코노미스트·포브스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