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숙청의 대외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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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일성의 장기에 걸친 대 숙청 극에 대해서 공산진영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56년의 세칭 「8월 종파사건」이라는 당내투쟁은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이 몰고 온 파문이었고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국제성을 띠고 있었다.
한마디로 56년은 소련공산당 20차 대회가 열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 4월에 노동당 제 3차 대회가 열리고, 당중앙위원회가 8월과 9월에 두 번씩이나 소집되었던, 긴장되고 불안한 한해였다. 그것은 김일성 개인숭배의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간의 숙명적 대결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사활을 결정하는 한 해이기도 했다.

<연안파, 김일성 비판>
전후경제는 복구사업이 능률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주민의 물질 및 정신생활은 두드러지게 불안정했다. 더우기 남노파 숙청, 소련파(허가의 등) 숙청 등 연이은 공포정치는 주민을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하급당원이나 대중의 불만요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민의 정치 도덕적 불안이 개인 숭배와 이에서 파생된 관료주의 출세주의, 공포정치에 기인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외국의 원조로 도시와 농촌을 건설하고 경제를 복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김일성은 당·정부대표단을 인솔하고 56년 여름 평양을 비우고 외국원조를 교섭할 목적으로 외국여행의 길에 나섰다.
김일성은 소련·중공 및 다른 공산국가들을 순방하고 한국전쟁 중 그들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에 사의를 표하고, 새로운 경제협정(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56년8월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당·정부대표단의 귀국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이 「8월 전원회의」에는 김두봉·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도 어떤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일성의 독주와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당내민주주의와 「레닌적 생활규범」을 확립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창익은 스탈린 사후, 특히 소련공산당 20차 대회 후 김일성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보게되었다. 『사회 발전사』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저자이기도 한 최창익은 김일성의 역사날조와 우상화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역사관이나 인생관에 대해서 염증을 느꼈다. 김일성의 전후 대내정책, 즉 주민의 생활사정을 배려하지 않은 중공업 우선의 대 공장건설 등 경제정책과 남노파· 소련파 숙청으로 조성된 공포정치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최창익은 김일성의 사업작풍과 활동에 대해서 연안파 간부들뿐 아니라 소련파간부들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박의완 김승화 박창옥, 그 밖의 사람들과도 상호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전에는 연안파 일부는 김일성의 배후조종으로 소련파 탄압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최창익과 김승화 등의 노력으로 그들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많은 오해들이 풀렸다. 연안파가 소련파를 치고, 소련파가 연안파에 치이면서 이들은 김일성의 본성을 이해하게도 되었다.
최창익은 소련대사관과도 당내에 조성된 정세에 대해 협의했다.
중개역은 건설상이었던 김승화가 맡았다. 그 결과 노동당정치위원이며 부수상 최창익과 소련대사관 삼사간에는 김일성의 개인숭배 문제를 비롯한 북한정세의 평가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최창익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즉 이 당시 소련 측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의 상식이 있기 때문이다. 최창익은 성사가 시간문제인 것으로 생각했다. 박창옥은 의기양양하게 동료들간에 낙관적 전망을 선전· 선동하고 다녔다.
최창익의 「구당」 계획은 예기치 않은 일로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소련대사관 참사의 배신행위가 그 한 원인이었다. 소련참사는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서는 자기의 독자적 판단으로 최창익의 주장에 긍정적 태도를 표명해놓고 돌아서서는 뒤에 상부로부터 있을지도 모를 책임추궁이 두려워 최창익의 담화내용을 북한 외무성에 정식 통고했다.

<소련참사의 배신>
그래서 김일성은 외국여행 중 연안파의 동향을 이미 알게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체재 중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국제국장 「포노마로프」가 북한 안의 정세에 우려를 표명하고 비판과 충고를 주었다. 이는 노동당 안의 움직임에 대한 소련 측의 관심표명이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과오를 시정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이 「8월 전원회의」가 열리기 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김일성 개인숭배를 둘러싼 양파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회의가 열리자 상업상 윤공흠(연안파)이 먼저 반대토론에 나섰다. 그는 김일성 개인숭배와 그의 정부시책 및 당 사업에 대해서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윤공흠은 휘파람과 소란 등 조직적 방해로 토론을 끝내지 못하고 중도 하단 했다. 휴회가 선언되고 회의는 중단되었다. 그 틈을 타서 윤공흠은 서휘(직총 위원장) 김강(선전성 부상) 이필규(전 내무성 부상) 등과 함께 지프로 신의주를 거쳐 중공으로 망명했다.
「8월 전원회의」에서의 연안파의 목적이 권력투쟁이었다면 성공률이 전혀 없는 비판보다는 군사정변을 일으켰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군부와 내무기관의 실권은 연안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김웅(민족보위성 부상), 이권무(총 참모장), 장평산(평양지구주둔군단장), 방호산(육 대 총장), 왕련 (공군사령관), 김한중(공군사령부 정치부장), 박훈일(내무성부상) 등의 이름을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김일성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소련파 장성들의 호응도 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안파가 「스탈린」 적인 김일성에게 「호르시초프」적 수법으로 대항한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과오였다.
「8월 전원회의」 후의 사태는 중·소 공산당의 우려를 자아내었다.
이어 열린 「9월 전원회의」는 소련으로부터 파견된 「미코얀」과 중공의 팽덕회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들은 노동당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해와 탄압을 중지하고 개인숭배를 청산하여 「레닌적 생활규범」을 회복하도록 충고했다.
그래서 「8월 전원회의」 후 출당 처분된 당원들이 원상 회복되고 김일성도 중·소 공산당의 충고를 받아들여 당 생활의 정상화를 약속했다. 이처럼 8월의 혼란은 그 뒤 잠정적으로 안정이 회복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 후 새로운 사태를 맞게 되었다.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그리고 헝가리에서 반소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소련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한 뒤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스탈린」 시대에 흔히 유린되었던 각국 공산당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선언이었다.

<스탈린식 숙청단행>
8월과 9월의 두 달 동안에 두 번의 전원회의를 열고 이 중·소 양국의 압력으로 상반된 결정을 채택했던 김일성은 이 선언으로 행동의 자유를 되찾았다. 그에게는 이 선언은 검사의 체포장, 대 숙청의 면허장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박헌영의 처형에 대해서도 소련 측은 수수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부하린」을 일단 숙청대상에서 제외하여 안심시킨 뒤 기습을 가한 것과 유사한 수법으로 박헌영을 제거했다. 즉 이승엽 이하 남노파의 중진들을 숙청하면서 박헌영만은 안심시켰다. 그래서 박헌영은 자기의 손발이 잘리는 것을 눈앞에 보고도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마침내 무장해제 된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소련대사 「이와노프」는 소련정부의 이름으로 박헌영의 「사형집행」연기를 고려하도록 북한당국에 충고했다. 이때 김일성 대변인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네들의 의견을 물은 적이 없다』고 하여 거절해버렸다. 56년4월 노동당 제 3차 대회에는 소련공산당 대표단(단장 브레즈네프)이 참가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 박헌영 「숙청저지」를 강경하게 요구해 올 것은 명백했다.
그래서 박헌영은 소련공산당 대표단이 도착하기 직전 즉 56년4월에 처형되었다고 말해진다. 처형을 기정 사실화하자는 것이었다.
어떻든 김일성은 중·소의 압력과 개입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반대파들을 철저히 제거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김일성의 외교활동과 대외선전활동이 적지 않게 주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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