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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초대내각(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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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승만 시대는 1인 통치였고 독재였다고들 한다. 4·19에 의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그런 인상이 더욱 짙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역들은 이 박사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얘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성격적으로 「원맨십」이 강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각료나 비서가 처음 임명되면 여러 얘기 끝에 영어로 우리 나라가 독재국가로 돼서는 안 된다. (Never should be police state)는 말을 곧잘 했다. 실지로 이 박사는 3권 분립을 존중했다. 초기엔 국회에도 자주 나갔고 대법원도 존중했다.
초대 대법원장 임명 때 그는 김용무씨를 지명하려 했는데 이인 법무가 반대하고 김병노씨를 추천했다. 그런데 이 박사는 46년 민주의원 의장을 맡게돼 김씨에게 법률고문을 맡아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이래론 만난 일이 없는 소원한 관계였다.

<사법부 독립 존중>
이 박사는 <그 사람은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한 김규식 계열이라던데… 안돼> 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다음날 이 박사는 총리 등 몇 각료가 있는데 대법원장으로 또 다른 제 2후보를 내세웠지만 장관들이 <김병노씨가 적임자>라고 하자 <모두들 의견이 그렇다면…>하고 자신의 뜻을 굽혔다.
경무대의 법률 담당비서였던 안희경씨(현 변호사)는 이 박사는 『사법부의 독립성에 유의했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아무리 바쁜 때라도 대법원장의 면회신청이 있으면 모든 스케줄을 연기하고 먼저 만났다. 그럴 때인데 한번은 대통령이 재판에 간여하는 서류를 김 대법원장에게 갖다주라고 일렀다. 나는 이를 전달치 않고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며칠 뒤 그 서류 건을 챙겼다. 나는 <곧 갖다 드리겠읍니다>고 대답한 뒤 김 대법원장에게 <이런 사실이 있으니 원장께서 대통령께 설명을 드려야겠다>고 부탁했다. 그래서 곧 김 대법원장이 다녀갔는데 이 박사는 나를 부르더니 <내가 잘못 생각을 했어. 대법원장 말이 옳다>라고 했다.
이인 법무도 같은 얘기를 썼다.
『당시 법무장관은 대법원과 행정부간의 업무 연락도 맡고 있는 데다 판·검사의 교류를 위해 서로 긴밀히 협의했는데 대통령은 판사는 물론 검사도 상신하면 「가만」으로 승인해 주었다. 당시 법무행정은 내가 군정검찰총장을 맡고있다 법무가 되어 인수인계에 번거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판·검사의 봉급이 낮아 문제였다.
그때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판·검사들이 짝이 다른 신발을 신고 옷은 무릎을 기운 것을 입고 법정에 나가곤 했다. 이 때문에 유능한 법관들이 오지 않으려 했고 사직서도 많이 제출됐다. 이우익씨 같은 이는 대구 고검장으로 기용하려는데 번번이 거절해 나중에 대통령 면담까지 시켜서야 승낙을 받아냈다. 나는 <독립군의 일원이란 마음가짐으로 참고 견디자>고 해 유능한 법관들을 눌러 앉혔다』고 했다.
그 무렵 대통령은 국무회의 때마다 새 정부의 과제를 부처마다 마련해 나오도록 채근했다. 모든 부처가 열성적이었고 법무 등 몇 개 부처는 성적이 우수했다.
그랬기에 인사도 포함해 거의 간섭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부처가 한결같을 수는 없었다. 내각의 불화와 정실인사 등은 대통령을 실망시켰다. 막료진의 표면화된 첫 싸움은 윤치영 내무와 대통령특사로 임명된 조병옥 경무부장의 다툼이다.
당시 미 군정은 새 정부의 행정능력을 못미더워해 재정과 치안행정은 점진적 이양방침이었다. 특히 경무부를 내무부 4개국 중의 1국으로 축소하는데 우려를 표시했다. 바로 이 경찰권 이양문제가 두 사람 사이의 불씨였다.
윤치영씨는 당시를 회고, 『유석(조병옥씨 호)은 경찰 통솔망과 각종시설의 완비를 이유로 경찰권 이양을 6개월쯤 보류하라고 했다.
정부가 이를 거부해 미군관계자는 곧 이양하겠다는 공문을 내게 보내왔는데도 유석은 두 차례에 걸쳐 경찰청장 회의를 소집하고 지연작전을 펴기에 내가 그를 구속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유석이 미 고문관을 통해 이양서류를 보내와 더 이상의 말썽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윤 내무는 작년 K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경찰권 이양에 관한 서류가 되었으니 만나자고 해 황희찬 내무차관을 데리고 가서 조병옥과 미국인 고문관을 만났는데 서류에 세 조목이 있단 말예요 무엇인고 하니 첫째 기구를 축소하지 말 것, 둘째 요원들을 이유 없이 바꾸지 말 것 등. 내가 이걸 그대로 국회에 보고를 하면 조병옥은 녹는 일 이예요. 그래 사적으로 가서 <이걸 국회에 보고하면 자네가 역적이 되네>라고 얘기한 것 이예요.
이런 얘기들을 하다가 나와서 신문기자단에 발표한 것이 문제됐어요. 경찰청장회의를 두 번 세 번 열고 재정권·경찰권은 안 내준다해서 흥분해서 민족반역자라는 소리가 나온 것 이예요.
대통령께 내가 얘기했습니다. 조병옥이를 가두자고…. 그랬는데 대통령이 반대를 하셨어요.』
이에 대해 조병옥씨의 뒷날 해명. 『나는 국립경찰을 이양하되 2만5천명의 경찰을 치안국 1국에다 관할케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해서 내사 안으로 대통령께 건의를 했다.
사안이란 내무차관 2명을 두어 한 차관은 일반행정, 다른 한 차관은 경찰행정을 담당토록 하고 경찰청을 두게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나의 사안에 찬성해 이런 기구준비가 되는대로 이양키로 한다는 것을 내무장관 군정 경무부장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런데 내무부에서 기구의 준비를 갖추지 않아 이양이 지연되었다.
그랬음에도 갑자기 윤 내무가 국회에 나가 조병옥이 미 군정연장을 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윤 내무의 오해고 경솔한 비난이었다』 (나의 회고록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당시 기획처 예산국장이던 이병호(현 국제로터리한국총재단 의장)씨는 『경찰권 이양을 지연시킨 것은 조병옥씨의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찰에는 일제 때의 경찰관 상당수가 남아 있었는데 새 정부에선 일제경찰은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논의가 있던 때여서 그들은 이양된 후의 신분문제를 걱정했고 이것이 치안상의 공백으로 나타나지 않을까를 조 부장은 걱정했다. 그래서 편제와 부당한 인사조치가 없도록 요청했던 것인데 두 사람 사이가 원만했다면 내부적 양해로 해결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까지 말썽이 됐다. 그해 8월28일 윤 내무는 국무회의에서 경찰권 이양이 늦어지는 경위를 보고하면서 <경찰권 이양은 우리들 한국인끼리 할 것이지 어째서 미국인을 내세워 지연시키려는가. 조 경무부장의 과거의 반역행동을 내가 폭로할 용의가 있다>면서 구속하겠다고 노발대발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보도되자 국회의 한민당계 의원들이 윤 내무를 공격하고 나섰다.

<"민족반역자라니">
조한백 의원은 『조 경무부장은 이미 대통령특사로 임명되어 있다. 이런 조 특사를 민족반역자라고 한 윤 내무의 발언은 용납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준연 의원도 나서 『윤 내무는 앞서 노일환 의원을 민족반역자라고 했다가 취소한 일이 있다.
이번에는 조 특사를 반역자라고 했는데 이 발언을 규명치 않은 채 그대로 둔다면 민족반역자가 대통령특사로 해외에 나가 새나라 외교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결국 윤 내무가 『조 특사에 대해서는 경찰권 이양문제와 관련해 나로서 유감스런 점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민족반역자라고 말한 일은 없다. 이것은 전혀 신문의 잘못된 보도 탓이다』라고 해명해 국회의 화살을 비켜섰다.
내각 안에서도 불화가 자라기 시작했다. 조각에서 싹튼 윤 내무와 장택상 외무간의 반목이 그 하나. 초대 법제처장이던 유진오씨는 『초기 국무회의에서 장 외무와 윤 내무의 알력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고 자금문제 탓에 상공· 재무와 기획처간에 자주 충돌했다』 고 했지만 아뭏든 두 장관은 국무회의에서까지 서로 말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 반목은 장 외무의 주장대로라면 대통령에도 그 책임이 있다. 뒷날(56년)의 이에 대한 장 외무의 회고.
『첫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외무와 내무가 바뀌었어>라고 했다.
이 총리가 <바뀌었다는 말을 못 알아듣겠습니다>라고 하자, 대통령은 <내무가 외무로 가야되고 외무가 내무로 가야되는데 이게 뒤집힌 것이야>라고 했다. 그래 내가 일어서서 <그건 안됩니다. 국무위원 구성을 사흘도 안돼 바꾼다면 정부위신이 말이 아닙니다> 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이 총리도 <저 지금 각하 말씀을 알아듣겠는데 장 외무장관이 윤 내무장관에게 경찰문제는 수시로 연락해서 잘 해결하도록 하고 기타문제는 내무가 알아서 할 테니까…>라고 얘기를 하니까, 대통령은 <글쎄…그러면 한 3개월쯤 두어보지>라고 했다.』
윤치영씨는 당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장택상씨가 군정수도경찰청장으로 세 차례나 폭탄투척의 고비를 넘기며 공산당과 싸운 공로를 생각해 이 박사께 내무장관으로 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이 박사는 처음 장관명단에는 외무에 내 이름을 써넣었다가 갑자기 장택상으로 고친 뒤 내게 내무를 맡으라고 해 <저는 내무행정에 경험도 없어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런데 이 박사가 그대로 발표해 버렸다. 여기서 당초 내무를 바랐던 장씨가 유진산과 함께 <장관자리가 바뀌었다>고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또한 나와 이범석 총리가 가깝다고 해서 인촌이 총리가 못된 것이 나의 장난이라고 D지에서 모략을 했다.』
그러나 장택상씨는 이 총리와 윤 내무의 특별한 친분을 근거로 <두 사람이 합동작전을 펴서 내무로 내정된 나를 외무로 바꿔치기 했다>고 단정했다.
이 총리와 윤 내무의 특별한 친분이란 두 사람이 경기고 선후배 사이라는 것(이 총리가 1년 후배). 또 강원도 이천(원산부근) 출신인 윤치영씨 부인은 어릴 때 이 총리 부친의 귀염을 받아 수양딸이 됐고 이 총리와도 보통학교 동기인 것 등 집안끼리 오랜 세교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총리와 윤 내무>
결국 장씨는 <이 총리가 중요 포스트인 내무에 자기에게 벅찬 장택상을 기피했다>고 단정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반목이 깊어지자 대통령은 이를 걱정했다. 어느 날 국무회의를 마친 뒤 이 대통령은 이 총리를 자리에 남으라고 했다. <내무하고 외무가 싸움질하는 것 좀 말려보오. 왜들 싸움을 하는지… 그래서는 안돼 총리가 말리시오>라고 했다. 이 총리는 <알겠습니다. 제가 두 장관에게 부탁해 잘 되도록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두 사람 사이의 공평하고 적절한 제 3자적 중재자가 되지 못했다. 여전히 두 사람의 냉전상태가 계속되자 대통령이 조정에 나섰다. 그 과정을 박용만 비서의 증언으로 옮겨보자.
『이 총리도 중재에 실패한 얼마 뒤의 일 이예요. 대통령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내무와 외무가 너무 싸워서 내가 골치가 아파. 두 사람이 잘 지내도록 박 비서가 얘기 좀 해봐>라고 하셔요. 두분 다툼을 저로서 무슨 수로 화해를 시킵니까.
대통령의 말뜻, 무엇인지 처음엔 몰랐어요. 며칠 곰곰이 궁리를 하다가 <이거다> 싶어 먼저 장 외무장관한테 갔지요. <대통령께서 부르십니다> 그랬더니 장 외무가 <왜…윤 내무도 불렀어?> 그러기에 <아니오, 장 장관님만 불렀습니다> 그랬지요. 장 장관이 모처럼의 단독호출이라 으쓱해서 대통령실로 들어갔지요. 대통령은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들어온 장 장관에게 <장 장관, 요즘 일 잘하고 있다는 평판이야…자네를 믿네>라고 격려해 보냈지요.
그리곤 다시 기회를 보아 윤 내무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대통령실에 혼자 들어가 면담케 했지요. 그리곤 얼마 있다 두 분을 함께 대통령실에 들어가게 했읍니다. 대통령이 두 분을 앉혀놓고 어떻게 중재를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국무회의 등 공식적인 자리에선 의견교환도하고 서로 양보도 해 관계개선이 되어갑디다.』 <제자·철농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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