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소더비 경매에 조각작품 내는 회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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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이원형(59)씨는 두 개의 명함을 갖고 있다. '조각가' 이원형(www.wonleeartist.com)과 '회계사' 이원형이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분야에서 그는 나름의 평가를 받는다.

조각가로서의 그는 지난해 뉴욕 아트 엑스포에 출품했고, 올해는 런던 조각공원으로부터 4점의 대형 작품을 의뢰받았다. 올 가을에는 영국 소더비 경매에 작품 두 점을 내놓는다(그는 현재 소더비에 보낼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다). 내년 개교 100주년을 맞는 모교 휘문고에 기증할 기념 조각도 제작 중이다.

회계사로서의 그는 토론토에 'Lee & Company'라는 회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작품을 하기 위해 자리를)몇 달씩 비워도 아무 문제없이 굴러갈 정도로 기반을 잡고 돈도 벌 만큼 벌었다.

세살 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아 척추가 휜 그는 대학(한국외국어대 영어과) 때 교정 수술을 받기 위해 넉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수술을 며칠 앞두고 "성공하더라도 이후 5년은 꼼짝하지 말고 누워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린 그는 '그렇게 하기에는 젊은 세월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병원에서 탈출했다. 영종도 일대를 떠돌다 3주 만에 귀가한 그는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고, 결국 진로를 변경했다.

1973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스앤젤레스의 페파나이나대 미대에 진학했다. 주경야독 끝에 1등으로 졸업했다. 전시회를 열고 작품도 팔았지만 그는 늘 가난했다.

"가난한 건 참 견디기 어려웠어요. 독신일 땐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미술이고 뭐고 돈부터 벌어놓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주저없이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다. 그곳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인 회계사 공부를 시작했다.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한 뒤 토론토에서 회계사무소를 냈다.

다시 붓을 잡은 건 생활이 안정된 89년 이후.

"칼날 같은 감수성이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오랜 시간 세상에 물들어 둔해졌더군요. 너무도 힘들어 여러 번 포기할까 했습니다."

2002년 미국 버몬트주 존슨주립대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공부를 하던 어느 날, 그는 다시 갈등에 빠졌다.

세계적인 거장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서다.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내겐 (거장이 갖는) 특별한 1%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조각은 달랐어요. 로댕이나 미켈란젤로 작품을 봐도 겁이 안 났어요." 두 달여 버몬트 일대의 산을 쏘다닌 끝에 조각가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돌아도 너무 돌아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세월은 많이 손해봤겠지만 (다양한 인생 역정은) 그 손실을 보상하고도 남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며 씩 웃었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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