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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기피증 (Xenophobi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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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세계 100여 개국에 퍼져 있는 화교(華僑)들은 대체로 거주국에서 상당한 부를 쌓고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화교'라고 부르지만 영어권 국가에서는 'Overseas Chinese'라고 불리는 이들 화교 자본은 중국 개방 이후 중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 나서 고속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특히 동남아에서는 자산의 60%, 상권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과 어깨를 맞대고 살아온 까닭에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 젓가락문화권에 속해 있는 등 문화적 뿌리도 엇비슷하다. 또한 최근 중국이 우리의 최대 교역상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가까운 이웃나라다. 그런데 중국과 중국인, 특히 화교자본에 대한 우리의 대접은 그동안 어땠는가?

세계 어디에나 가면 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이 아직도 서울에 없고, 크게 사업을 하는 중국인 역시 많지 않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80%가 종사했던 중국 요리점조차 보건소와 구청이 닦달하여 지금은 대부분 한국인 소유로 변했다. 어느 중국 친구는 필자에게 독백하듯이 "우리가 너희와 국경을 맞대고 4000년을 살아왔는 데도 이렇게 우리 중국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아마도 지구상에서 유일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듯 화교에 대한 배타적인 정서는 서양인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한국전쟁에도 참전했고, 무상원조 물자를 팔아서 나라살림을 꾸릴 정도로 많은 신세를 진 미국이지만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미국에 대한 감정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이 같은 상황을 보면 우리는 세계의 그 어느 민족이나 국가보다 외국인 기피증(Xenophobia)이 심한 나라인 것 같다. 아마도 올림픽에 이 같은 종목이라도 있다면 단연 금메달감일 것 같다.

수입하기보다는 수출에 더 역점을 두고 수출은 잘한 일, 수입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문화사업, 체육경기 등 해외에 나가서 하는 것은 모두 장한 일이요, 특히 메달이라도 따오면 더욱 잘한 일이다. 기술수출은 장한 일이고 로열티를 주고 기술을 도입하면 망국적인 일로 치부한다. 서울에서 보는 외국상표 광고는 기분이 나빠도 외국공항에서 우리나라 상표가 새겨진 카트를 미는 것은 대견한 일로 여기고 있다.

최근 장나라씨가 중국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리고 있고, 일본에서는 배용준씨가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결코 우리 국민에 뒤지지 않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그라질 줄 모르는 한류(韓流) 열풍에 대해 우리 국민 모두가 뿌듯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화류(華流)와 일류(日流)가 발붙일 구석은 없다.

우리의 외국인 기피증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생활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에도 인색하다. 서울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국제 공용어인 영어가 이같이 통하기 어려운 도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의 불평이다. 또한 관광객이 서울에 와서 단체관광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관광을 할 수 없는 곳도 서울이다.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대상국으로 꼽히기에는 여기저기에 장애물이 아직도 많다.

최근 들어 외국인투자가 개방되고 유치실적도 많이 늘고 있지만 지난 10년간 우리의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Xenophobia 챔피언'인 국민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선진경제로의 도약은 요원하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변해야 할 때다. 변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장래를 낙관하기 힘들다. 외국기업에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사업하기가 좋은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화류나 일류가 발붙이기 힘들고, 한국을 떠나는 외국기업에 대해 마치 독립군이 승전한 것같이 받아들이는 국민정서로는 희망이 없다.

양담배를 마리화나 피우듯이 몰래 주머니에서 빼내 피워서는 안 된다. 외국기업에 기업천국을 만드는 길만이 한 차원 높은 선진경제로 도약하고 국민 모두가 잘살게 되는 날을 다가오게 하는 길이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