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문화 꽃 지키려 신장·폐까지 바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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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마지막 옥새 전각장 민홍규씨가 경기도 이천의 작업장에서 자신이 만든 옥새를 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 위 사진은 민씨가 복원한 고종의 옥새. 외교문서에 사용됐던 "황제지보(皇帝之寶.(아래))"와 백성에게 담화를 발표할 때 쓰인 "명덕지보(明德之寶)"다.

사방 10cm 공간 위에서 펼치는 1mm 예술. 조선시대 왕실의 도장이자 상징이던 옥새(玉璽) 제작 기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문 용어로는 '영새부'(榮璽)라고 한다.

왕실의 도장이 위조되면 안 되었기에 철저히 한 사람에게만 비전돼온 기법을 최후로 보유하고 있는 옥새 전각장 민홍규(51)씨.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중학생이던 15세 때부터 스승인 정기호(1899~1989) 선생에게 17년 동안 영새부를 배웠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후계자가 없다. 왕이 없는 시대에 더 이상 옥새도 필요없기 때문일까. 그가 30일 출간할 '옥새'(인디북 출판사)엔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붙들고 40년 가까이 씨름해 온 전통 예술인의 회한이 담겨 있다.

"옥새는 궁중 문화의 꽃입니다. 저를 끝으로 옥새의 전통이 더 이상 전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책을 냈습니다. 핵심 비법은 따로 써서 아내에게 맡겨 놓았어요. 혹시 제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아내가 공개할 겁니다."

일종의 유서다. 조선시대에 옥새에 대해 발설하는 것은 금기였다고 한다. 지금 그에겐 왼쪽 폐와 신장이 없다. 쇳물을 녹이는 섭씨 1500도의 뜨거운 가마 옆에서 작업하며 생긴 직업병이라고 했다.

작은 위안이 있다면 최근 국가기록원에서 그를 옥새 전각장 후계자로 공식 인정하는 공문을 보내 온 일이다. 광해군 때 옥새 전각장 이엇금부터 시작해 철종 말기의 황식, 고종 전기의 전흥길, 고종 후기의 황소산, 근대 이후의 정기호, 민홍규로 이어지는 18명의 계보를 확인시켜 준 것. 스승인 정기호 선생이야 서예가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정 선생의 제자임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옥새 전각장에게는 '12년은 돼야 인발(印發)이 선다'는 말이 내려온다고 했다. 글자의 모양과 두께가 제대로 나오는 숙성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옥새를 배우는 데 최하 12년이 걸려요. 전통 경전 교육 4년, 서예 공부 4년, 전각 학습 4년 등입니다. 옥새는 서예.회화.조각.전각.금속공예.동양철학 등이 망라된 전통 종합예술입니다. 여기에 금이나 은, 흙과 칼 등 각종 재료를 준비하고 쇳물 녹이는 방법 등을 익히는 것까지 합하면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제자가 두 번 들어온 적이 있는데 견뎌내지 못하더군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1년 간의 공정을 거쳐 완성된 옥새를 손에 들 때의 기쁨이 컸기 때문이다. 전통 문화를 보전하겠다고 다짐한 스승과의 약속이 있었고, 중국과 일본에선 맥이 끊긴 옥새 전각장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에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고종시대 옥새를 완전히 다시 복원하는 것입니다. 60개 정도 되는데 제 손으로 만들어 경복궁 안에 세울 조선왕실박물관에 전시하고 싶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종 옥새 3과는 한국전쟁 중에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서 찾아다 준 것이지요. 나머지 없어진 것을 못찾으면 복원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는 덕수궁 내 궁중유물전시관에 있는 어보(御寶)는 옥새와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관인(官印)인 옥새와 달리 어보는 왕을 기념해 존호나 시호를 새긴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옥새만 가져간 것입니다."

그를 아끼는 이들은 옥새 전각장이 인간문화재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장, 임옥상 화백, 최열 환경재단 상임이사, 서지학자 김영복씨 등이 30일 오후 7시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민씨의 책 출판기념회를 연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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