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라인강의 기적」|중공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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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0년 3월 어느 날의 함부르크 공항-. 두 줄로 깔린 붉은색 카페트 주변에 당시의「한스-올리히·클로제」시장 등 함부르크의 저명인사들이 정장차림으로 도열해 있고 카메라맨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전망대에선 많은 시민들이 귀빈의 도착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중공의 화국봉이 선물로 보내 준 두 마리의 팬더 곰이 플래시를 받아가며 카페트 위로 여유 있게 걸어나오는 것이었다.
79년10월 화국봉의 서독 방문을 계기로 서독의 중공바람은 거의 병적일 정도로 거세게 나타났다.
현지 중공유학생들은 다른 외국인학생과는 달리 별 따기만큼 어려운 방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집주인은 중공유학생에게 선뜻 방을 내주는데 그치지 않고 독일어를 공짜로 가르쳐 주는 호의까지 베풀기도 한다.
대학의 중국어강좌는 항상 만원을 이루고 영화나 연극마저 「중국」자가 붙어야만 흥행에 성공한다.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함부르크 등 대도시들이 중공무역 관의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느낌이다.
심야 프로라 해도 중공에 관한 것이라면 꾸벅꾸벅 졸면서 TV앞에 앉아 있는 등 중공바람이 몰고 온 에피소드 또한 얼마든지 많다.
중공바람은 또 중국음식 집까지 번져 한 때 연간 3O%씩의 매상이 늘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서독의 중공바람이 북경까지 미쳤다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프랑크푸르트∼북경간의 대륙횡단 항도는 언제나 초만원이며 80전후 북경호텔에선 서독 인이 전체투숙객의 30%를 기록했다.
중공을 방문하는 각종단체·기관대표단의 규모도 엄청나 아예 비행기를 전세 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80년 전후의 중공바람은 중공의 공업화정책에 편승해 돈벌이를 해보려던 서독사람의 상혼이 크게 작용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서독을 휩쓴 중공바람도 81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여 중공이 공업화정책을 수정하고 서독의 회사들과 체결한 계약을 파기함에 따라 열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79년10월 슈피겔지가 중공과 앞으로 4백50억 마르크(한화 약13조5천억원) 의 거래가 가능하다고 보도했을 때「슈미트」수상이 보인「깊은 우려」가 불행하게도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슐레만사 등 컨소시엄이 보산냉간 공장건설계약(5억 마르크)을 체결한데 이어 루르기사가 석유플랜트(16억 마르크), 만네스만-덴마크사가 강관플랜트(4억4천만 마르크)를 수주케 되자 서독의 경제계는 축제분위기를 이루었었다.
심지어 서독의 신문들마저 중공을「제2의 사우디아라비아」로 표현하는 등 황금러시를 앞둔 흥분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무슨 돈으로 공업화정책을 밀고 나가겠느냐 던「슈미트」수상의 우려가 그대로 적중해 81년2월 무더기 해약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제2의 사우디아라비아」경기 붐을 타고 기세등등 했던 루르기사와 슐레만사의 주식이 하루아침에 폭락했다.
이 사태가 서독인의 대중공관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랜트계약의 해약사태 이후 중공사람이라면 무조건 후하게 대해주던 서독인의 인심이 달라졌고『중국식당에선 고양이 먹이로 요리한다』는 낭설까지 나돌았다.
심지어 중공과의 교류가 현저히 줄어 프랑크푸르트∼북경항로마저 텅텅 빈 채 운행될 만큼 플랜트계약의 해약사태가 남긴 상처는 깊다.
중공이 경제적 종이호랑이로 보이자 중공바람도 가라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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