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범죄의 재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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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큰 세상'이란 이름의 재벌 대우(大宇), 십 년 전만 해도 세계경영의 화려한 꿈을 아시아.남미.동유럽에서 활짝 펼치던 재벌 총수 김우중은 소인왕국의 걸리버였다. 지난주 유랑생활을 접고 귀국하던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실크로드를 달리던 그의 건각은 힘에 겨워 후들거렸고, 부채에 짓눌린 어깨는 처져 있었다. 화난 군중이 그를 에워쌌다. 재산을 날린 소액주주들, 부실경영을 성토하는 시민단체들, 공적자금 탕진의 죄를 묻는 언론에 둘러싸인 그는 이제 걸리버왕국의 소인이었다. 소인이자 범죄인이었다. '죄를 져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자성의 말을 남기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의 죄목은 분명하다. 분식회계 40조원, 사기대출 10조원, 불법 외환유출 200억 달러, 여기에 미회수 공적자금 15조원. 이 정도면 초대형 경제사범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그만의 죄인가, 아니면 범죄가 생성된 과정상의 문제인가?

그의 죄는 '세계경영'의 방식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하노이에 전자공장을 세웠다. 공장부지를 무상으로 불하받고 경영자금은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5년 정도 가동하면 그 공장을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인도의 뉴델리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고 때마침 선풍을 일으켰던 마티즈를 쏟아냈다. 우즈베키스탄에 건설한 자동차 공장은 그 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현대식 기업이었다. 내친김에 유럽시장 공략의 교두보를 폴란드 바르샤바에 구축했다. 당시 적자로 허덕이던 폴란드 최대 자동차기업을 인수하고 대우마크를 달았다. 폴란드의 그 유명한 솔리대리티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던 대우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GM)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로 떠올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영업을 개시한 대우은행은 단시간에 소액 저축을 끌어모았다. 예금통장을 발행하는 한국식 서비스에 헝가리인들이 마냥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정예 기병에 기대를 걸었던 칭기즈칸의 꿈처럼, 대우는 도처에 구축한 전자와 자동차공장에 세계경영의 운명을 걸었다. 5년만 기다리면 꿈은 이뤄진다고 믿었다. 차입경영이 끝날 것을 의심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외환위기가 급습하자 차입경영은 곧 유동성 위기라는 악몽을 불렀다.

1998년과 99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모든 기업인이 현금을 구하러 천지사방으로 뛰어다닐 때, 국제통화기금(IMF)이 명한 국제결제은행 기준을 맞추려고 은행은 돈을 회수하고 더 이상 풀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지금은 잘나가는 삼성전자의 모 사장이 은행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토로할 정도였을까. 워크아웃과 빅딜이란 명칭의 새로운 방식이 선을 보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워크아웃 대상이어도 정치권과 채권단은 공적자금의 원활한 회수를 위해 매각을 선호했을 것이다. 한국 기업의 바겐세일이 그래서 일어났다. 대우자동차는 GM에 헐값으로 넘겨졌다. 투기자본에 넘어간 은행들을 비롯해 헐값에 처분된 알짜 기업이 어디 한둘이랴. 피로 쌓아올린 한국 경제와 투지가 무장해제되는 순간이었다. 외환위기의 삼적(三敵)을 정치권과 관료의 태만, 대기업의 방만한 투자, 금융권의 과잉 차입으로 규정하면, 외풍에 취약할 정도로 부풀려진 대우는 삼적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외국 투기자본은 맛난 먹이를 낚아채려는 듯이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그리고 IMF가 발한 비상계엄하에서 잔칫상이 차려졌던 것이다.

월드 뱅크의 자문역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 하버드대학 제프리 삭스 교수는 IMF의 관리방식이 부적절하고 과도했다고 뒤늦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이자율 20%에 국민은 과잉 고통을 겪었고, 대기업은 과잉 판매되었으며, 공적자금도 과잉 투입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성공'으로 평가되는 당시의 위기관리전략 속에 혹시 대기업을 도산과 매각으로 몰아간 조급함은 없었을까. 당시의 정치권은 대우가 개척한 '한국 실크로드'를 외국 자본에 넘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긴 쓴 건가? 그것이 반드시 대우가 아니었어도 말이다.

김우중 전 회장은 과연 단독범인가, 아니면 정치적.정책적 결단에 의해 죄가 생성된 것인가?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으로 되돌아가 범죄를 재구성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예나 지금이나 정부 정책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중대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