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천씨 집성촌 ―부산시 석대동 |찬석이 일가 끌고 숨어산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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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부산시석대동. 남향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야산 기슭에 5백여호의 주택이 대도시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둘레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마을 어귀, 고등소채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단지가 내려다 보이는 길목에는 2평남짓한 비각(비각)이 서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곤 한다.
여기가 바로 영양천씨 중시조인 천만리장군의 후손들이 3백여년간 살아온 천씨의 본고장이자 5대째 연속 효자를 낸 효자마을이기도 하다.
병자호란후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사람을 잡아들이던 청군을 피해 만리의 4대손인 찬석이 가족들을 데리고 숨어살기위해 이곳으로 피신, 터를 잡은 것이 오늘날 전체가구의 80%인 4백여호가 사는 천씨마을로 변했다.
이곳 천씨들은 찬석의 아버지이자 만리의 손자인 경주의 후손으로 그의 벼슬을 따라 선부공파로 불리기도 하고 경주가 살던 지명을 따 청도·동성파라고 하기도 한다.
이곳에는 중시조의 14대에서 18대손까지가 살고 있다.
『밖에 나가 벼슬할 생각은 아예 버리고 농사일이나 열심히 해서 살도록 하라는 선조의 말씀이 대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한마을에서 모여살게 된것이지요. 원래는 이 마을도 외진 산골이었는데 부산시가 커지면서 도시로 바뀐 셈이지요.』 영양천씨 부산종친회일을 도맡고 있는 천경도씨(62)의 설명이다.
이 마을에는 종손 광호씨(68·16대)집도 있으나 3백여년전 이곳에 첫발을 디딘 선조 찬석이 살던 집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5대손인 학수씨(67)의 어머니와 아들·손자등 4대가 한데 모여사는 이집은 4칸짜리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예부터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는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어 오래 앓던 사람도 이 집에서는 숨이 끊어지지 않아 임종때마다 다른 집으로옮겨야 장례를 치를수 있었다는 것이다.
『천씨는 단일본인데다가 가문의 역사도 다른 성씨에 비해 짧은 편이지요. 그러나 3, 4대때부터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산골에 숨어산 연유로 왕래가 전혀없어 문중이 외로울 수밖에 없었지요.』 부암국교장 천장률씨(59)는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한지역에 모여사는 집안에서는 효자·효부가 쏟아져 나올만큼 가정이 화목한 것이 또한 전통이라고 말한다.
조선명륜록·망적록등에 따르면 찬석의 6대손 성태에서 시작하여 그 아래로 세모·술운·상련·우형과 우형의 처 김해김씨는 대를 이은 효자·효부로 기록되어 있다.
석대동 천씨문중회 부회장 천채년씨(47)는 『그분들의 효성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별세후 3년간 시묘를 했는데 산중의 호랑이가 나타나 호위했고 뜻밖에 묘지부근에서 옥같은 샘물이 솟았다가 시묘가 끝나자 호랑이도 샘물도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온다』고 했다.
이들의 효행을 낱낱이 적은 포창완의문등 관계문헌·서류등 1백여점은 지금도 석대동 천씨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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