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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파일] 훔쳐보기 & 훔쳐봄을 당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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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관객은 도둑놈이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남의 사생활을 슬쩍한다는 얘기죠. 우리는 어두컴컴한 객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팝콘에 콜라를 능청스럽게 마시죠. 그리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시선을 스크린에다 꽂습니다. 남들의 로맨스에 눈물을 흘리고, 섹시한 장면에선 노골적인 상상도 하죠. 맞아요. 바로 '훔쳐보기'예요. 어찌 보면 영화 감상의 본질이고, 그런 감상이 안겨 주는 쾌감의 뿌리이기도 하죠.

영국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1899~1980) 감독도 그랬죠. 그는 '관객=도둑놈', 혹은 '관객=관음증 환자'라는 등식을 과감하게 내밀었어요. 그리고 대표작인 영화 '이창(Rear Window)'에서 이런 의견을 명백하게 드러냈죠.

기억나세요? 무대는 아파트였어요. 아파트, 대단히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죠. 앞동에 사는 남녀가 창문을 통해 뒷동에 사는 이웃들의 일상을 훔쳐봅니다. 그러다 결국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스릴러물이죠.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도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노려보는 시선. 섬뜩한가요?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게 1954년입니다.

그로부터 50년하고도 1년이 더 흘렀네요. 바뀐 건 강산만이 아니죠. '훔쳐보기' 공식도 확 달라졌어요.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입니다. 아날로그적인 아파트 창틀은 이제 공룡이 돼 버렸어요.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선 것은 바로 '카메라'입니다. 사각의 창틀 대신 사각의 앵글이 이제 당신을 훔칩니다. 디지털캠.화상캠.카메라폰.몰래카메라 등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찍힐지 모르는 세상이 돼버렸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연애술사'도 그런 두려움을 소재로 썼죠.

다음 달 7일 개봉하는 영국산 스릴러 영화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사진)'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은 적이 있는 남자가 주인공이죠. 경찰은 여전히 그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언제 또 누명을 쓸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알리바이를 위해 자신의 24시간을 모두 비디오 카메라로 찍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죠. 그동안 찍은 테이프 수만 무려 9만7663개. 그는 이제 카메라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시켜야만 살 수 있게 된 거죠. '제3의 시선'이 그에겐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소호흡기가 돼버렸습니다.

여기서 신예 존 심슨 감독의 통찰력이 돋보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디지털 인간은 이제 '훔쳐보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단히 적극적으로 '훔쳐봄을 당하기'에 나섭니다. 각종 블로그와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과감하게 노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이젠 그런 노출이 소통의 또 다른 방식이 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오늘은 어떤가요? 무엇을 훔쳤고, 무엇을 도둑맞았습니까.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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